
군내무실에서 [오션스 일레븐]을 일요일의 악명 높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틀어주는 걸 처음 봤을 즈음과 동시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지워버렸다. 왜냐, 여자라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줄리아 로버츠 하나만 달랑 나온다는 것 때문이었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카프카]는 흥미있었지만 심심했고 [에린 브로코비치]는 최소한의 흡입력은 있었지만 평범했다. 그냥 그래서.
그래도 운명은 나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강요하는 건지 뭔지. 뭐 기회가 되다 보니 기회가 생겨서 오션스 일레븐과 트웰브를 한번에 다 볼 수 있었다. 흐음....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의 메타테제와도 같았던 [웰컴 투 콜린우드] 때가 더 나았고 멧 데이먼은 말을 거의 안하던 제이슨 본 시리즈 때가 훨씬 멋졌으며 브래드 피트는 다시는 타일러 더든은 못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벵상 카셀은 너무나 전형적으로 미국영화에 나온 프랑스배우 같았고 돈 치들은 기억이 안나네. 우하! 캐서린 제타 존스는 예외. 애 낳고 난 다음 어지간히 떡대가 좋아졌지만 그래도 그저 매력이 철철.
무엇이 이 별들이 솓아져 나오는 영화를 심심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트웰브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나왔을 때일 것이다. 말그대로 브루스 윌리스역을 하기 위해 출연한 브루스 윌리스는 줄리아 로버츠역을 해야 하는 테스(줄리아 로버츠)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착각과 실제를 넘나들며 신경전을 벌인다. 재밌게도 줄리아 로버츠가 가장 살아있는 테스처럼 연기하는 순간이 줄리아 로버츠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이 순간이라는 것은 배우틈에 끼어 꼼짝 못해야 했던 스티븐 소더버그가 마련한 유희이자 영화가 가진 아이러니의 표상일 것이다. 이 장난 같은 시퀀스는 그 많은 스타들이 나왔음에도 이 영화가 소품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이유와 영화 속 배우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을 환기하게 만든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레드드래곤]이 생각났다. 에드워드 노튼, 랄프 파인즈, 하비 케이틀, 안소니 홉킨스 같은, 오션스 시리즈와는 다른 의미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향연인 이 영화 또한 보긴 분명히 봤는데 머릿 속에 남아있는 게 없는 영화였다. 해서, 다시 보게됐다. [러시아워] 시리즈의 성공과 방정맞은 입담으로 까불이 감독의 지위에 당당하게 오른 브렛 레트너가 [양들의 침묵]의 놀라울만한 성과와 [한니발]에 쏟아진 혹평에 얼마나 민감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는 감독의 통제권을 벗어난지 오래인 연기파 배우들의 입김까지 더해져 더없이 정석을 달리는 영화로 태어났다. 그렇게해서 보이는 건 분명 배운데 그 배우들 중 인상에 남은 이가 없는 것은 미묘한 미스캐스팅 덕이 아닐까. 에드워드 노튼은 물에 물탄 것 같은 느낌으로 한니발의 광기에 젖기는 커녕 영 시큰둥해 보이는 눈치고 덕분에 무지막지한 카리스마를 뽐낼 기회를 잃은 안소니 홉킨스는 살 빼고 보톡스 맞고 온갖 고생 다하셨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늙어보인다. 랄프 파인즈는 원작의 기괴한 용 같았던 인물이라고 보기엔 너무 잘 생겼고 하비 케이틀은.... 전화를 잘 받는 것 같았다.
뭐, 생각해보면 6시간.... 좀 아깝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