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네것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없게 읽었던 소설. 인간 퇴화의 과정에 대한 점층적 관찰기. 뒤의 해설지에서 보네것팬덤에서도 가장 크게 호불호가 나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거니와 난 당연히 안 좋아하는 쪽. 실상 이 소설을 기점으로 커트 보네것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커트 보네것 자신이 인정한 최고품인만큼, 아마 앞으로의 그의 소설에 대한 하나의 비평적 이정표로 남을 [제5도살장]은 어쩌면 40줄 들어서서 겨우 문단과 대중의 지지를 얻게된 보네것 자신의 소설형태가 비로소 완성을 맺은 순간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아마도 이후의 그의 작품세계의 원형.

1985년에 발표된 [갈라파고스]에서 매너리즘의 무책임함을 느껴야했던 나는 보네것 소설의 희망을 엉뚱하게도 1963년에 발표한 [고양이요람]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장기인 인류파멸극의 모범적이고 세련된 풍경을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그가 바라는 대안적 세계의 일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 속 보코논교가 보여주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되려 가치있는 종교라는 역설이 전해주는 교훈은 어쩌면 그의 소설 전체가 보여주는 장엄하면서도 웃기는 허무주의의 세계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변론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기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쾌적한 안락사를 부여받은 인물들을 통해서 인간이란 존재 자체보다는 인간'성'이 가질 수도 있을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