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에 대한 첫번째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는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보장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은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아주 오랜 옛날에도 그저 애니메이션이 텔레비전에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그 전날 하루를 두근거리며 보내야했던 때가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하던 것에만 목을 메던 시절이 끝나는 계기가 됐던 중학교 때 처음 불법비디오로 보게 된 [천공의 성 라퓨타]는 그날 하루동안 세번을 돌려서 봤다. 그 애니메이션이 보여줬던 표현상의 역동성과 스토리적 측면에서의 황홀한 완결성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쩌면 이 때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애니메이션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 최초의 예였던 [아기공룡 둘리]의 애니메이션판. 각색이라는 과정에 대해 처음으로 인지케 한 작품이기도 했다. 원작을 얼마나 훌륭하게 말아먹었는지 최근에 나온 이 완전판을 읽어보면서 다시금 기억나버렸다. 연타석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후두부를 두들겨줬던 같은 예인 [영심이]도 추가.

내가 애니메이션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인가. 몸담고 있는 모 카페 주인장과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새삼스럽지만 마치 DNA에 새겨져 있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나로선 그와 관련해선 정말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제대로 된 문제제기였다. 그것은 이야기가 전해줬던 즐거움 때문도 아니었고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실사 컴플렉스에서 파생된 묘한 리얼리즘 지향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재미없게 봤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 중에서도 특히 떠벌이 알리가 별의 별 행위들로 난리를 피우던 [알라딘]을 너무도 좋아한다. 기호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이해력에 바탕을 둔 현실에는 없을 색과 선의 축제. 그러니까 아주 뒤늦게서야 깨닫게 된 나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에 대한 답은 그것이 '움직이는 그림'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몇번째인지도 모르는 체 [프리크리] 1화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제서야 난 어째서 [프리크리]가 나를 그토록 매혹시켰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순수한 형태, 이상적인 형태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리크리]에서 의미를 논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것은 [프리크리]의 전작이 저 [신세기 에반게리온], 통제불능으로까지 쉴새없이 의미를 늘어놓음으로써 수많은 이들을(아마 감독까지 포함해서) 지치게 만들었던 작품이란 것을 상기하자면 꽤 흥미있는 결과물인 셈이다. [프리크리]에서 발견되는 다분히 감독의 개인 취향적인 이미지들과 의미들은 무수하지만 실상 의도적으로 방치되고 있다. 무슨무슨의 비밀, 무슨무슨의 역사, 원한관계, 근친상간 등등, 그딴 거 따지지 마라. 이해가 아닌 느낌. [프리크리]는 성장드라마라는 강한 컨셉을 중심에 바짝 두고 동화 같은 공간 안에서 끝내주는 음악과 함께 미친듯이 달려다니는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 역동성이 전해주는 쾌감, 그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캐릭터들과 전개, 감정이입에 있어서의 자연스러움. 그렇다.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

요즘은 애니메이션을 예전처럼 보지 않는다. 무감해져버린 내 감각 때문인 것인지 근간의 애니메이션들은 나를 사로잡는 무언가가 없다. 이상하다. [프리크리]를 봤던 것처럼, 그저 '움직이는 그림'이 전해주는 쾌감에 주목하면 되지 않을까. 근데 그게 안된다. 무엇보다도 안된다. 써먹을 데까지 써서 거적데기 같은 이미지들과 스토리. 뻔한 흐름과 늘어지는 전개. 셀의 풍부한 느낌이 사라져버린 디지털 채색도 보기가 싫다. 요즘 애니메이션을 보는 방법은 중간에 뚝뚝 끊어서 옮겨가면서 보거나 적어도 2화까지는 참고 보기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그대로 겪어내야 한다는 나의 고지식함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려온 건지. 움베르토 에코가 편집자의 입장에서 사드의 책을 평한 에세이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뻔한 책은 몇 페이지 읽어보면 대강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가장 최근에 본 애니메이션은 [스팀보이]. 시간과 돈의 허망함을 [원더풀 데이즈]만큼이나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대범작이었다....


그러고보니 곧 일본에서 개봉한다. 가이낙스 배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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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적긁적 2005-04-1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천공의 성 라퓨타' 비디오, 내가 본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드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