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전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을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아쿠타가와상을 탄 다음, 하도 사방팔방에서 난리를 치던 것이 도서관에서 차마 책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지저분해진 [일식]을 고르진 못하고 그의 다른 작품인 [달]을 고르게 한 것이었음이다. 당시의 나는 소위 세간의 평판이 만들어내는 몰려다니기식 상찬의 전통에 충분히 익숙해져(지겨워져) 있었고 그런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달]을 접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달]은 멋진 작품이었다. 그 한마디로 충분할 정도로.
그 이후에, 난 [일식]을 보려고 노력했었다. 왜 노력까지 해야했느냐면, 그것이 당최 손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책이 조금 두려웠다. [달]을 본 이후로, 나는 [일식]이 나에게 경이를 줄지 실망을 줄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이후로 다시는 손창섭의 작품을 보지 않은 것처럼.
마광수 시집을 보게된 헌책방에서, 나는 큰맘 먹고 [일식]을 구입하게 됐다. 도서관에 있는 것은 너무 망가져 있었다. 그런 핑계로. 하지만 핑계야 어떻든, 책이 집에 있든 가방 안에 있든 쉬이 손에 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후회하는 거지만 오랜 머뭇거림은 내 태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일식]을 다 읽었다. 여러가지 번역상의 난제를 안고 나온 이 책은 그 리스크 탓인지 상대적으로 꽤 평이하게 보여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괜찮은 작품. 그러나 이단사상과의 충돌을 다루는 소재에 있어서 그 고증의 집요함에도 불구하고 번역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조금 부족하다는 인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냥 모조리 번역상의 난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 속편할 수 있겠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