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처음 알게 된 건, 어렸을 적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로 봤던 우주해적 코브라에서였다.


새빨간 쫄스타일 패션을 고집하는 센스와 함께 항상 시가를 물고 느끼한 미소를 흘리고 다니는 장애인 우주해적 코브라 선생. 여자를 무지 밝히는데 여자를 유혹하는 매너나 유혹 당하는 여자들의 풍만근육스러운 모습이나 아직 로리콘과 유아체형에 더럽혀지지 않은 시대를 반영하듯 양키 센스 100%의 양상들이 펼쳐진다. 요건 경성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인데 무삭제 완역 한국어판이라는 설명이 책에 세군데에나 박혀있고 번역자의 이름까지 표지에 떡 하니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정식계약을 맺고 출판한다는 설명과 증명은 어디에도 붙어있지 않은 신비로운 물건이다.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듯.

자유인인 코브라가 하도 이곳저곳에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짜증이 난 해적길드는 코브라를 족칠려고 암살자도 파견하고 함정도 만들고 뭐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주는데.... 그 해적길드의 왕초인 사라만다란 양반이 실은 히틀러였다는 설정. 대강 읽다보면 제3제국 중얼중얼도 나오고 위 그림과 같은 대사도 나오는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그 정도 반전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니면 내가 멍청했던 거든가-_- 아무튼 히틀러라는 이미지는 그렇게 초장부터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게된 것은 이 히틀러의 정신분석이란 책에서였다. 여기서 묘사되는 히틀러, 아주 대단한 분이시다. 자유분방에 SM플레이어, 배설물 매니아 등등. 과대망상으로 포장된 자신의 겉모습을 채워줄 수단으로 변태적 성행위에 탐닉하는 제3제국의 총수님이 망명한 히틀러의 측근들의 증언과 증거들을 모아 나름껏 분석을 시도했다는 미국 국적을 가진 정신과 전문의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이 책은 인격자와 권력자가 침실 안에선 얼마나 짐승 같은지 알고 싶어하는 이들을 만족시키고 히틀러라는 인물이 저지른 행위들의 비정상성에 대해 그만한 비정상적인 무게를 부여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젠 CIA의 역공작이라는 설이 파다하다(그에 대한 정확한 지적으로는 히틀러가 무척 금욕적이었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여러 사료나 증거로도 증명되거니와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진 자가 일중독에 금욕적이기까지 했다는 것이 되려 비정상적인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상당히 설득력이 높다). 일단 대상을 정신병-히스테리의 영역에 들어온 것으로 간주하고 시작되는 정신분석적 분석에 비추어서도 여기서 묘사되는 히틀러는 아주 중증의 성도착환자로 묘사된다. 그는 미친 게 맞긴 맞았다. 그러나 아주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지 약물과 섹스, 배설물에 취해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히틀러라는 인물과 그 주변에 대해 보다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업계에선 비슷한 연구를 위해서라면 꼭 거쳐야 할 하나의 참고서적이 되버린 요아힘 페스트의 이 평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이전까지 나에게 있어서 사드의 소설 주인공이었던 히틀러는 정말로 미쳐버린 인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흥미가 생겼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권력을 잡는 과정은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기대가 만나 철저하게 개인화된, 그리고 사적인 영역의 법칙과 욕구, 가치관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어 확대재생산 된, 그 이전엔 유례를 찾아볼 수 없거니와 앞으로도 찾기 힘들 것인, 시대와 개인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미치광이 괴물의 탄생과 죽음을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였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과 그보다 많은 무기들이 동원됐고 지구의 거의 모든 땅에서 살육이 벌어졌던 그 모든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히틀러의 사고와 환상에 완벽하게 대입이 되는 순간, 그리고 그 폐허만 남은 공간이 오버랩되는 순간, 어처구니 없이 우스광스럽게 추락해버린다. 나는 그 감각, 어쩌면 인식의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감각이 좋았다. 이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사이코드라마의 연극용 대본을 만들어보고 싶다. 죽기 전 일주일 정도를 다룬. 그 절망적이고 텅 빈 공간에서 보여지는 병약한 인간들의 슬픈 유희를.

하지만 난 게을렀다-_- 문제는 달리 중요한 게 아니다. 게으름. 바로 그것이다.



알렉산더 소코로프가 먼저 그 영역을 잡아냈다. 죽음 직전, 히틀러와 결혼했던 에바 브라운의 시선을 따라 그려진 독일-러시아 합작 영화인 <몰로흐>에서 뭉개진 화면은 인간의 고독과 폭력에 대한 성찰을 담아냈다. 그것은 긴 몽환이었고 충분히 유미적이었으며 애절하고 연극적이었다. 그리고 졸렸다-_-



그리고 올리버 히르비겔이 만든 <몰락>을 보았다. 엉망진창인 자막이긴 했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맘에 드는 영화였다. 무엇보다도 100% 독일인이라는 스탭, 캐스팅, 현지촬영이 뿜어내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외양은 확실하게 갖춰졌다.

이 작품이 센세이셔널리즘을 자극한 것은 히틀러가 광포하고 막무가내인 독재자가 아닌 늙고 소심하며 병약해서 인간적으로까지 보여지는 늙은이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악마가 조커처럼 거부감 드는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건 수퍼맨 시절의 DC코믹스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다. '교부들은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의 손길을 뿌리칠 줄 알아야한다고 했으니'. 이미 가치의 고정화를 경계하는 잠언은 수천 년 전부터 있었던지라. 추한 괴물 히틀러가 아니라 인간 히틀러로 보여짐으로서 히틀러라는 괴물은 진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홀로코스트를 만들어내고 전세계에서 벌어졌던 전쟁에 책임이 있으며 30여년 뒤에 대륙 하나 바다 둘 건너 나라에서 그려진 만화 속에서 3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욕을 쳐먹는 악역이 되야 하는(여기서 그럼 도조 히데키는 뭐야, 라고 살짝 물어주는 편이 현명하다. 혹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는 천황 가문에 대한 질문도 유효하다) 이 늙은이가 정말로 별 게 없고, 그저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채식주의자라는 점은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이다(원작이 된 트라우들 융게의 자서전에선 히틀러의 우회한 도착증세에 대한 얘기가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혹자에겐 안타깝게도 그것은 신경증 증세가 있는 소심한 성격의 노인네가 가진 폐품모으기 같은 정도의 사소한 취미생활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히틀러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비서 트라우들 융게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광경들은 광기와 이성이 절묘하게 결합된 기이한 공간의 이야기이다. 그곳에서는 브랜디와 음악, 아이들의 천진한 합창노래와 상관에 대한 경의들을 단숨에 광기로 만들어버리는 자살방법에 대한 논의와 집단자살, 좁혀져오는 포위망과 독약, 거짓말과 거짓된 공간에 대한 모습들이 뒤엉켜있다. 그 위태로운 매트릭스의 복판에서 헤매던 트라우들 융게가 그 모든 것에 대해 가장 경악스럽게 느끼게 되는 순간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끝난 뒤에 나오는 대역이 아닌 그녀 본인의 인터뷰 장면에서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우습게, 동시에 지독하게 슬프게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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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rabbit91 2006-07-07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락을 보셨군요.. 마지막 인터뷰장면 정말로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의심이 될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든것의 부정.. 슬프다는 말에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