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용
박흥용 지음 / 청년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너무 솔직한 제목 그대로 이 책은 박흥용이 1986년부터 월간 만화광장과 주간만화에 발표됐던 단편들 18편을 모아 4개의 파트로 나누어 수록한 단편집이다. 시간순으론 그가 본격적으로 만화광장에 데뷔하게 된 '백지'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들은 왜 만화광장이란 잡지가 이후에 창간되는 성인 지향의 한국만화잡지들에게 넘어서야 할 벽으로 존재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창기 시절의 작가들이 가지는 치기어림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박흥용의 단편들이 보여주는 호흡은 진중하고 무거우며 근간의 우리나라 만화들에서 쉬이 느껴지지 않는 성찰이 보여진다. 당시의 만화광장엔 이희재와 오세영 같은 작가들도 있었던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지타산이 맞았다고 하니 이 잡지가 이후의 한국성인만화잡지들이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벽이자 꿈같은 대안이 되버린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한국만화라는 정체성에 대한 결벽증과 이득산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가 행복하게 결합되리란 건 근간에 와선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 일이고, 그것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종이 만화 산업의 전반적인 축소화 경향과 인터넷 매체의 확산이 불러온 검열의 모호성이 문제로 떠오른 지금에 와선 어쩌면 좀 늦은 판단이 아닐까 싶다.


암튼,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단편집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하나같이 가난과 제도적 폭력 밑에서 살아가며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위치에까지 이른 이들의 삶은 고난하기만 하다. 박흥용은 이 작품집에서 세상을 약자와 강자의 대립각으로 확실하게 세워두고 약자들의 입장에서 세상살이의 고난함과 페이소스를 이끌어내고 있다. 분명히 그의 만화 속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의 만화는 그렇게 슬프지만도, 억지스러운 감동을 자아내지도 않는다. 또한 그 세계는 그 무수한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최지룡의 만화처럼 광기에 시달리는 세상도 아니다. 기본적인 인식만큼은 세상은 약육강식이라는 확고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지룡선생과 일치하는데 말이다.


만화평론가인 정준영이 책 말미에 쓴 해설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성찰이라는 키워드로 이해 가능하다는 풀이를 써놓았거니와, 나는 그것을 능청스러움이라고 보고싶다. 성찰을 통해 얻어낸 능청스러움. 이것이 해학이고 이 정서란 것이 그의 만화를 다른 만화들과 구분짓게 하는 중요한 가름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신이 드러내는 인물들만큼이나 능청스러운 이 작가는 세계가 만들어내는 결과에 대해 뻔히 알고 하층민 특유의 궁상맞은 여유를 동반하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통해, 그 가혹함을 중화시키고 있다. 이것이 최지룡과 박흥용이 갈리는 지점이다. 극단적인 망상을 통해 블럭버스터적 가혹함으로 세상을 바꿔놓은 최지룡의 작품은 인디펜던스데이를 위시한 미국형 DDR용 블럭버스터 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성찰이 배제된 세상이며 평행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의 시선이다. 세상은 그런 망상보단 훨씬 더 냉정하고 계산적이다. 박흥용의 시선은 그런 세상을 꿈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좀 더 차분하게 바라보고 진심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재밌는 것은 이 작품집에서 단편의 시간적 추이에 따라 작가가 자신만의 색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86년작인 '백지'와 1988년작인 '잃어버린 향' 등의 작품을 보면 오세영의 '월북작가 단편순례'나 김동화의 '한국단편문학선집'에서 볼 수 있었던, 단편 소설을 만화로 표현해낼 때의 연출들인 정적인 씬의 표현과 그에 부가되는 설명구의 강조를 통한 일종의 그림소설적인 양상이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반면 1992년작인 '나무 위에 사는 나무'에 이르면 작가 특유의 해학과 능청스러움이 잘 드러나는 연출이 완연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겠다.


현재에 이르러서 일본만화와 한국만화의 차이에 대해서 벌이는 논쟁은 무의미해졌다. 만화는 만화인 것이고, 그것으로 족하다. 일찌기 양영순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더 많이 일본만화를 베껴야 한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결국 진정한 작가라면 자신의 한계와 그것을 돌파할 힘을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었다. 스타일이란 것이 파고들고 파고들어 정형화되면 결국 매너리즘에 사로잡히게 되고 작가라면 그것에 대해 고민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을 통과한 작가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작가는 사라져버린 걸 알고 있다(심지어 김성모조차 이현세의 어시들을 끌어와 용주골 블루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대에 박흥용이란 작가는 독자적인 자신의 길을 찾아냈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 몇 안되는 장인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움만 추구하는 근자의 만화들에 비추어, 일종의 소화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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