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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룡의 만화를 알게된 것은 박무직이 키노에 이상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었던 그의 동인작품집을 소개한 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만화는 형편없는 작화였지만 지독하리만큼 솔직하게 작가의 의식 속에 존재하던 강박과 폭력을 전혀 여과가 안된 상태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장이었고 그런 노골적인 감정의 표현은 보는 이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박무직의 광고 덕에 당시 찍어놓은 동인지가 다 팔렸었더라는 얘기가 있었다).

수 년이 지나서 다시 보게된 그의 만화는 여전했다. 여전히 못 그리고 여전히 연출은 엉망이었고 여전히 그의 세계는 분노와 좌절과 폭력과 부조리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거쳐오면서 그의 만화가 가진 폭력적인 솔직함이란 메리트는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진화한 극단적 감각들의 손쉬운 접촉으로 인해 더이상 자극을 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만화에 한가지 추가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성이었다.

그는 세계를 기본적으로 부조리한 세상으로 본다. 온갖가지 범죄와 폭력, 비리와 주제를 모르는 인간들에서부터 교회 목사에까지 이르는 짜증나고 쓸데없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계를 설명하려면 그의 막가파식 제단이 가장 솔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 세계를, 부조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약육강식,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죽이고 착취하는 법칙이다. 최지룡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오직 강한자와 약한자가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강한자에게 착취 당하는 약한자들의 일상사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법과 권력은 가식의 상징이자 강한자가 약한자를 착취하기 위해 보다 용이하게 써먹을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그는 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은 운동권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기득권이 결국 자기들 뱃 속을 채우기 위한 연극 이상이 아니고 북한은 호시탐탐 학살과 남침만을 꿈꾸는 늑대와 개, 돼지들의 소굴로 그려진다. 평등이라는 환상 속에서 힘없는 우민들은 힘있는 자들의 먹이가 되고 그들자신들도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래서 그의 세계를 꿰뚫고 있는 것은 뭐 하나 상대보다 나은 점이 보이지 않는 인물들뿐이다. 그런 의미에선 그가 인간을 보는 시선은 매우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평등이라는 단어가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자리는 목표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본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개인에게 미래란 어떤 것인가. 그의 만화가 정체된 지속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일정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이야기의 속성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 그가 꾸는 꿈의 끝인 셈인데 그 결말 대부분은 전면적인 파멸에의 매혹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시선이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같은 세력과 공유될 순 있지만 일치할 수 없는 것은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건 체제의 안정이라는 환상의 세뇌를 통한 자신들의 이득의 극대화이지 무정부 상태나 인류 멸망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지룡이 그리는 세계는 작가에 대한 판단을 무척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조선일보 구독 신청 배너까지 달은 그의 정치적 행동성에 비해서 그의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는 조선일보를 구독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세계가 아니거니와 극우의 시야로 봐도 너무 무정부주의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간혹 드러나는 군인의 영웅적 태도에 대한 찬양과 나치와 일제에 대한 매혹은 그것들이 예정된 파멸을 상징하는 아이콘들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가진 시선이 미래가 아니라 타나토스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삶이란 게 결국 다 똑같은 것들의 거기서 거기인 자뻑잔치들인데 무슨 낙으로 지속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대안 자체가 거세되어진 세계에서 맞이할 수 있는 선택이란 결국 '모두 다 뒈져버리면 좋겠는데'의 패배적 감상주의로 결착되어진다. 그것은 동반자살에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험하다고 보긴 힘들 것 같다. 작가 자신이 말한대로 그의 만화는 작가 자신의 망상이 가감없이 펼쳐지는 공간이며 그 망상의 과정이란 게 정보 자체를 불신하고 기초적인 인식의 틀마저 거부하며 노골적인 유치함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방법론적인 호응을 얻기가 힘들다. 다만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솔직함은 심정적인 동요를 일으키는데 충실하게 기여하는 것으로 작가 자신이 바라는 나름의 카타르시스 역할을 해낸다. 망상이 제국을 지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그리고 그 결과를 영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몽상가들보다 많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그의 만화는 마치 좀 길고 기괴하게 변형된 리플놀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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