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령 등급의 리뉴얼 버전 DVD. 2002년 7월 발매로 업계의 관습인 우려먹기 스킬을 충실하게 따라서 같은 타이틀의 세번째 발매품이라는 사실이 아름답다.

 

처음 택틱스의 1997년작, moon을 플레이했을 때, 나는 시즈쿠도 안 해봤고 키즈아토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애초부터 트렌드에 입각하여 게임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내릴 소양은 충분히 부족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moon을 플레이했던 시간은 나에게 게임을 함에 있어서 가장 강렬했던 시간들 중 한 순간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프 돈벌이의 본격적인 시작, 비주얼 노벨 2탄 키즈아토. 아울러 열광적인 팬덤의 형성. 가문과 혈통의 비밀과 연쇄 살인, 십대 소년적 낭만, 혹은 망상의 제례. 이후 비슷비슷한 다크물의 양산을 불러왔다.


당시의 택틱스는 여러 면에서 리프의 후발주자 면모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일단 18금 업계의 전반적인 코드는 엘프가 만들어낸 기존의 다크물들, 하원기가의 일족이나 노노무라 병원의 사람들 같은 끈적하고 가학적인 취향의 다크물과는 구별되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스타일을 살린 새로운 경향의 다크물인 리프의 시즈쿠-키즈아토 라인의 성공이 이끌어낸 다크물의 전반적인 상향추세와 F&C의 프랜차이즈 '피아 캐럿에 잘 오셨수'을 필두에 세운 순애물의 두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택틱스의 게임들은 일단 다크물(moon)에서 순애물(one)에 이르는 그 도정이 리프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한마디로 노골적인 후발주자이자 안전빵 영역의 잠식자) 일단 그 캐릭터 디자인부터 이타루라는 양반이 도맡아서 그렸는데 이 양반이 극로리 취향의 캐릭터들을 즐겨 그렸고(물론 타락할대로 타락한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선 초등학생한테 고등학교 교복 입혀 놓고 10대 후반 20대 초반이라고 우긴다고 개탄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리프의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모씨(?-_-기억이 안 나는구만...)의 노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후 회사에서 상여금 지급 불가를 선언한 모양인지 주요 스탭들은 택틱스를 빠져나가 역시나 연애 시뮬 전문 회사인 '키'를 설립하고 카논으로 대박을 터뜨리게 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 별 상관도 없는 이야기....-_- 아무튼 당시 택틱스의 사업 전략은 리프 꽁무니를 따라가기... 쯤으로 설명이 된다.


리프의 투하트 직후 택틱스에서 제작한(아울러 캐릭터 디자이너 이타루를 중심으로 한 스탭들의 택틱스에서의 마지막 결과물인) one... 사람에 따라선 투하트보다도 높게 쳐주는 물건. 개인적으로 저놈의 캐릭터디자인은 정자세포 형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_-


이 moon도 그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게임이 여타 다크물과 구분이 되는 점이 있긴 한데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더럽게 무겁고 어둡다는 거다. moon은 기존의 다크물이라 불리우던 것을 제대로 업그레이드시켜서 플레이어를 감정적으로 바닥까지 끌고 내려간다.



이쿠미의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교단 FARGO로 들어간다. 그리고 6년만에  돌아왔던 어머니. 잠시동안의 행복. 그러나, 원인불명으로 어머니까지 죽는다. 그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이쿠미는 진실을 알기위해 FARGO로 잠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하루카와 유이를 만나게 된다....


이 게임은 일단 장르는 어드벤쳐다. 뭐 이쪽 업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만 어드벤쳐로서의 기능이 특출나게 특화됐다곤 볼 수 없고 재수없게 경비원에게 걸리거나 길을 잘못 들면 굿엔딩과 배드엔딩이 조각조각 나뉜다는 정도라는 점에서 딱 업계 표준이다.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이쪽 업계의 실수요자 대부분이 남성이란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드물다고 할 수 있을 여성 '화자'인 이쿠미가 되어 교단에 잠입한 후 겪게 되는 해괴망측한 일들을 대면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게임이 재밌는 것은 플레이어가 여성 캐릭터가 되야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에 크게 문제가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인 이쿠미는 교단에서 행하는 실험에 반강제적으로 끌려다니면서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들을 당하는데 그것은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가학적인 실험들이다. 빛과 어둠을 이용해 따로 나뉘어진 폐소공포증적 공간에서 반복되는 의식적인 제의를 통해 이쿠미는 자신의 과거와 욕망을 말그대로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과정은 남성 소비자들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겪는 오묘한 즐거움과 가학-피가학적인 도해가 보일듯말듯 은근슬쩍 묘사되면서 해면체 부풀리기에 일조를 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놀랍게도 이 게임에선 그 모든 과정이 '고통스럽다.' 시나리오 라이터의 섬세한 손길은 이쿠미가 교단에서 겪는 폭력적인 일상이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벌어지는 얘기란 걸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어둠과 빛의 극단적인 대립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이쿠미로 감정이입된 플레이어는 이쿠미가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어머니와 친구들의 과거를 하나씩 알게됨으로써 얻게 되는 상처를 그대로 느낀다. 이게 참 신기한 일인데 적당한 수준의 센티멘탈리즘으로 채색되어 일견 달콤한 상상의 나래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던(동시에 처녀 숭배 경향이 있었던) 리프의 다크물과는 달리 이 게임이 보여주는 표현상의 과격함과 하드보일드 성향은 전혀 남성 지향적이지가 않다. 그 과정은 말그대로 고통의 순례 그 이상이 아니다. 주인공이 여성이어서 겪어야 하는 고통과 운명이 만들어내는 고통, 그리고 자신의 지저분한 영역을 들여다본다는 데서 오는 고통. 그 지저분함이란 것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측면이란 것을 인식하는 데서 온다. 아마도 이것은 플레이어와 캐릭터간의 성공적인 감정이입을 가능케 하는 스토리와 화자의 주안이 분명하게 '여성'인 이쿠미에게 맞춰진다는 점,  그리고 비주얼 노벨이 아닌 명목상이나마 어드벤쳐라는 장르적 특성이 주체인 플레이어와 이쿠미 간의 일체화에 강하게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달리 말이 필요 없는, 어둠의 공조자들을 위한 소름끼치게 아름다운 고백록.


moon은 제법 드문 경우인 '끝까지 몰아부쳐서 원본보다 나은 결과를 얻어낸' 일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레이시디에서 굴러나온 립버전으로 플레이를 해야 했던지라 나는 BGM으로 포티쉐드 1집을 깔고 플레이를 했었다. 그래서 게임 내내 지워지지 않는 고통과 눈물은 그리도 절묘하게 기능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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