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뿐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설
스며라, 배암!



 * 출전 : [시인부락]2호(1936)


 


화사를 꾸준하게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는 달리 찾아볼 것도 없이 뱀의 이미지다. 여기서 뱀은 강렬한 자극이 있는, 그래서 취할 수도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미와 추를 동시에 아우르며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이미지의 여행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뱀이라는 아이콘이 역사와 문헌들, 신화들 속에서 어떻게 다뤄져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가 가장 먼저 차용하고 있는 뱀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이브를 유혹하여 인간을 타락시켰던 뱀의 이미지다. 그래서 이후 기독교 시대 내내 서구에서 뱀은 사악함의 상징으로 취급받아왔다. 그러나 이 흥미로운 히브리 민족의 일대기 외에 다른 오래된 민족들의 전설 속에서 뱀은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식을 날라주던 헤르메스가 뱀 두 마리가 서로 얽힌 지팡이를 들고 다녔던 것처럼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와 전설 속에서 뱀은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는 입장이었으며 달의 대리자이자 다산의 상징이었고 허물을 벗는다는 특성 때문에 또아리를 튼 모습, 혹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 되어 무한과 영생을 상징하기도 했다. 사악한 피조물로 묘사된 구약성서에서의 뱀조차 이러한 뱀을 상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 뱀은 이브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준 것이며 그 열매는 지식의 나무라 불리운 것이었다. 성서에서 뱀과 동일시되는 루시퍼는 성서 외전에서 야훼가 가장 사랑했던 동시에 가장 강대한 힘을 가졌던 천사로 묘사된다. 그러나 루시퍼는 힘과 지식에 근거한 오만함으로 신에게 저항하다가 지옥으로 추락해버린다. 성서는 문명의 불가피함과 그 파멸적인 속성을 보여줌으로써 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고 그것은 다신교 문화였으며 당대의 가장 강력했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유대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성서에서 뱀은 유대교외의 종교들이 경배했던 신성함이 거세된 유혹자 이상이 아니었지만 다른 민족들에게도 뱀은 숭배하는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뱀이 금기가 된 것은 그 신성한 동물이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대 사람들이 잊지 않았던 것 때문이다. 그래서 뱀은 위험인 동시에 유혹의 상징이라는 모순적인 양상을 가지며 총체적으로는 인간이 가진 지식-지각에 대한 본능적인 갈구와 위험을 가리킨다.


'화사'의 화자 또한 그 모순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연까지 화자는 뱀에 대한 혐오와 매혹을 반복하며 왔다갔다 한다. 여기서 뱀에 대한 혐오는 뱀이 가진 독, 그리고 미끈한 몸뚱이가 만들어내는 징그러운 인상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묘사가 모호하여 쾌히 충분하진 못한 반면에 화자로 하여금 뱀에 대한 매혹을 끌어내는 것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 매혹은 뱀이 가지는 성적인 요소들 때문에 일어난다. 뱀은 앞서 말했듯 다산의 상징이며 종종 남성기와 동일시된다. 공간적인 묘사에 있어서도 사향과 박하 같은 후각을 자극하는 소재들의 쓰임은 화자가 서있는 곳을 흐릿한 환몽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준다. 또한 그런 공간 안에서 뱀에 대해서 언급할 때 신화적인 설명에서 빠지지 않았던 지적인 측면이 유혹 그 자체의 인상으로 전이된다(~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이것은 뱀이 가지는 육체적인 유혹의 강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에서 처음 쓰이는 붉은색의 표현이다. 붉은색은 이후 시에서 내내 감각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후 화자의 모순적인 감정은 점점 강해져서 뱀에게 취한 화자는 푸른 하늘을 물어뜯으라고 응원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푸른하늘은 성서적 의미에서 야훼의 대체물로 봐야할 것이며 붉은색과 대비되는 색으로 질서와 차분함, 침잠과 차가움을 뜻하는 것들에 대한 반항적 표현이라 봐야할 것이다.


화자는 결국 돌팔매질로 뱀을 쫓아내기 시작하지만 이내 홀린 듯 그것을 뒤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뱀에 대한 매혹을 온전히 고백해버린다.(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가뿐 숨결이야.) 그런데다 뱀을 따라가는 길은 사향(박하가 빠져있다는 것을 주목하자)과 아름다운 꽃들이 널린, 첫부분보다 더 화려해지고 성적으로 자극이 강해진 공간임을 짐작 가능하다. 화자는 뱀에게 완전히 매혹되고 그것은 소유욕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이어서 꽃대님과 같았던 뱀을 꽃대님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이집트로 날아간다. 정확히는 꽃대님보다는 더 유명하고 구체적이며 아름다운 상징을 찾아나선 것이리라. 그 대상은 클레오파트라다.


클레오파트라는 뱀과 무척 친한 여자였다. 뱀을 숭배했던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것이 그렇고 안토니우스와의 연애로 인해 파멸적인 여자를 상징하기도 했으며 죽을 땐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기구한 인생과 절대적인 미를 표상하는 이 여자의 피는 전통적인 원형으로 봐서 곧 생명이고 그녀의 대체물이다. 그녀의 피를 먹었다는 것은 그녀의 생명-그녀의 미美라는 상징의 전이됨을 가리킨다. 동시에 피가 묻은 입술은 앞서 묘사됐던 석유-석류로의 의미전이의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피와 석류로 인해 붉게 물든 입술은 유혹적이고 성적으로 발현된 상태로 화자는 그 안에 뱀이 스며들라고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석유-석류는 동시에 붉은색의 감각으로 귀결된다. 붉은색은 불, 뜨거움, 정열, 유혹 등등의 활동적이고 위험할 수도 있는 요소를 갖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원형이다. 그렇기에 붉은색은 금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유혹과 금기라는 뱀이 함께 품는 이중적인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7연에서 대상은 뒤에 이어지는 순네와 앞서 꾸준히 묘사된 '화사'와의 경계가 불분명하기에 실제적으로는 '화사'와 뒤에 이어서 등장할 순네가 융합되고 있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순네라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감각이 앞서 얘기된 성서-클레오파트라와의 지리적, 인종적인 이질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순네는 앞서 꾸준히 이어져 온 뱀의 유혹적인 양상과 클레오파트라의 미를 계승한다. 그녀는 또한 막 성년에 이른 스무살이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만개할 나이, 말하자면 가장 유혹적이고 성적인 아우라로 둘러싸일 시간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녀를 묘사함에 있어 고양이를 불러들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앞서서 클레오파트라가 나왔다고 하여 굳이 이집트로까지 이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여기서 고양이는 앞서 등장했던 뱀이 가지고 있던 신화적 신성성이 희미해지면서 뱀의 관능적인 면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전이된 것처럼 소위 요물로서의 고양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고양이는 길들이기 힘들고 이기적인 성미와 아기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울음소리를 지니며 짝짓기 때의 요란스러움 때문에 여성성이 요사스럽게 발현된 화신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여기서 보여지는 순네는 고양이로 표상되는 총체적인 유혹의 힘이 스며든 입술을 가지고, 화자는 그에 만족 못하고 따로 나뉘어 강조한 절(스며라, 배암!)을 통해 뱀의 이미지가 그녀에게 더해지길 보다 적극적으로 소망한다. 연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붉은색-입술의 연장선에서 해석되는 이 부분은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와의 동질성의 증거로 반복되는 구절이기도 하고 또한 석유-석류로 보여졌던 이중적 유희가 재발견되는 부분으로 오럴섹스의 구현을 은근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자는 성서와 클레오파트라 같은 비교적 동떨어진 원형적인 상징과 인물들을 지나 순네라고 하는 현실적인 인물에게 귀착되는 의식의 여정을 끝낸다. 여기서 결과이자 목적으로서의 순네는 그 이름에서 오는 느낌으로부터라도 앞서 얘기된 성서-클레오파트라를 주변화시키고 그에 대한 낯선 감각들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 낯설음이 지리적, 인종적인 차이만으로 만들어지는 문제라는 걸 인식하면 이 동떨어진 요소들의 긴밀한 협조가 만들어내는 자장의 스무스함으로 인해 도리어 신화, 원형적인 이미지들이 가지는 보편성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 안에서 혼재되어 날아다니는 의미들은 흡사 뱀의 움직임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며 의미와 언어의 충돌과 자극적인 감각을 생성해낸다. 만약 해석에의 머뭇거림을 포기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지향하는 바가 삶, 보다 정확히는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에 대한 원형적인 의미에서의 지향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뱀과 얽혀 죽음을 얻게된 이브와 스스로 죽음을 택한 클레오파트라의 운명은 죽음에의 의지와도 연결되는 바가 있다. 에로스적 양상과 타나토스적 양상에서, 비록 시에서 드러나는 바는 지극히 에로스적인 양상이지만 뱀이 전해주는 파멸과 두려움의 상징 또한 잊혀지진 않고 있고 그것은 서로의 의미를 상쇄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욕망 자체를 지향하는 이미지의 흐름, 그 뒤를 쫓는 해체적 작업의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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