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성냥갑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기억해보자면,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드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추리소설 작가인 줄로 알았던 에코는 나에게 글쓰기에서의 유희라는 걸 처음으로 가르쳐 준 양반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 나왔던 <연어와 함께 여행하는 방법>(이후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개정 확장판이 나온)은 말그대로 내 꼭지를 돌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웃겨줬다. 그것들이 무척 비범한 유머였다는 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거니와 그 책을 통해서 움베르토 에코는 나에게 관조하는 입장에서 웃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한 지식적 여유를 가진 자만이 사용 가능했던 개그의 영역이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범시대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장엄한(!) 지적유희였다.(커트 보네것에게서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에코는 확실히 그보다는 우아한 개그를 구사한다. 고약하게 얘기하자면 부르주아적인 것이겠고.) 동시에 이 책이 보여주는 성과들은 글쓰기에서의 지적유희가 마땅한 바탕이 없이 수사적인 영역에서의 얼치기 복제만으로 이뤄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모양새로 드러나는지 대차대조가 가능했던 모범적인 텍스트이기도 했다.

레스프레소에서 연재하는 칼럼에서 뽑아낸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비이탈리아권 독자들을 생각하고 편집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 소용범위가 생각외로 넓었지만 몇년이 지난 다음 개정판으로 나온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는 이탈리아 내의 문화-정치적 에피소드들이 더해지면서 주석의 필요성이 중요해졌다.(굳이 그런 조건이 아니더라도 알다시피 이 할아범의 책은 주석에 눈이 팔리는 일이 익숙해져야 한다) 이후, 레스프레소의 칼럼들 중에서 뽑아낸 2차 재활용본이라 할만 한 이 책은 이탈리아의 역사와 정치, 문화적 경황들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데 주저하질 않았고, 이것이 이 책이 비이탈리아-유럽권 독자들에게 난해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점일 것이다. 과연,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한니발>에서 멋지게 촬영된 피렌체와 시오노 나나미의 마초이즘적 작업, 언제나 요란스러웠던 베네통과 틴토 브라스의 포르노영화들을 통해서나 접한 나같은 사람은 이 책에 깔린 주석만으론 성에 차지가 않는다. 주석에다가 주석을 또 달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난감한 순간들에도 글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발정난 개처럼 돌아 다녔을 시절에도 시선을 서가로 잡아두게 만들었던 저자의 심원한 내공과 여유로운 유머다. <미네르바 성냥갑>은 스스로 패스티쉬에 역점을 두었다고 얘기한 전작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석적인 칼럼의 양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주를 이루지만 글쓰기에서의 유희가 만들어내는 탁월한 설득력과 즐거움을 잊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로 그 톡 쏘는 맛을 상상하며 이 책을 접하는 것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작용하는 지리적인 격차 때문에 그 기대는 조금 낮춰줬으면 좋겠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 책을 완전히 해독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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