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임기든지 특유의 킬러 타이틀이 있기 마련이다. 오직 그 게임을 위해서 게임기를 산다고 하는, 말하자면 주객전도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영향력의 게임. 어떤 이에겐(아니, 상당수의 사람에겐) 파이널 판타지가 그런 존재였고 드래곤 퀘스트가 그런 위치였으며 버추어 파이터도 그런 역할이었고 근간엔 메탈기어 솔리드가 그런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단지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서 드림캐스트를 샀다. 스트리트 파이터 3.


승룡권과 파동권만 가능하면 무적이었던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1.


전설의 시작. 승룡권을 마스터하지 못해서 맨날 블랑카만 골라야했던 기억이 쓰다.

스트리트 파이터3의 제작이 발표됐을 때, 아케이드 유저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업계의 전설이 되어 있는 저 스트리트 파이터의 후속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신작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는 충분했다. 거의 혁명이라고 불려도 무리가 아닐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등장은 당시까지 슈팅과 횡스크롤 액션, 퍼즐 등등의 한정된 장르 속에서 상호 복제를 거듭하던 아케이드 게임계에 떨어진 핵폭탄이었다. 단순히 게임장르를 넘어서서 하나의 트렌드로까지 발전한 스트리트 파이터 2는 본편은 수퍼 스트리트 파이터 2 터보라는 길기도 한 제목으로까지 진화되어 있었고 외전격으로 제작된 제로 시리즈도 성공적으로 나름의 팬층을 만들어내면서 자체적인 아우라를 양산하고 있을 때였다.


제로 시리즈 중 가장 인기가 좋았던 2. 교복 오타쿠들의 로망 사쿠라의 첫 등장. 전통적으로 제로 시리즈는 애니메이션적 질감이 나며 이는 후에 다크 스토커즈 시리즈로 발전한다.


재난의 시작.

물론 오락실들은 이 희대의 '작품'을 오직 그 이름만 믿고 CPS3 기판의 무지막지한 가격을 감내하면서 앞다투어 들여놓았고.... 그리고 망했다.


그러고보니 올해가 킹오파 10주년. 오래도 욹궈먹었다.... 신작은 나오미 기판으로 만들어진다는 듯.

시대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이하 킹오파)가 대세였다. 캐릭터성을 극대화한 필살기들과 한방마저 허용하는(물론 버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킹오파 시리즈가 가진 시스템적인 불안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화려한 연속기, 세명의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양적인 이점과 스피디한 전개 속도, 그리고 매년마다 신작 업데이트(전작에서 캐릭터 연산을 그대로 빼와 붙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가 되는 점은 킹오파가 세대와 맞춰간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B급 감수성의 발현이랄까.... 암튼 이기면 저랬다.

그런데 정작 공개된 스트리트 파이터 3는 번쩍이고 화려하며 양적인 과잉이 넘쳐나는 킹오파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던 대전 격투 게임 유저들의 시야로는 당최 이해가 안 가는 게임이었다. 우선 캐릭터부터,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가 달랑 둘, 류와 켄뿐으로 유저에게 익숙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다 고를 수 있는 캐릭터가 10명. 보스캐릭터인 길을 합해봤자 11명. 킹오파는 24명 이상이 기본이었던 상황에서 이 숫자는 다양성의 결여로까지 보였다. 그렇다고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 킹오파의 캐릭터들만큼이나 눈에 찰싹찰싹 달라붙었느냐, 그렇지도 못했다. 개개의 캐릭터들은 분명 강렬한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캐릭터들은 킹오파만큼의 예쁘고 눈에 착 와닿는 대중친화성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또한 킹오파에선 넘쳐날만큼 존재하는 화려한 필살기들이 여기선 대전격투게임의 기본 패턴만을 차용한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초필살기는 세 개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써야될 정도로 금욕적이었다. 대쉬는 매우 짧았고 기본기에서부터 필살기까지 기술 발동 시간들은 대부분 느릿해서 묵직한 느낌을 받도록 고안되었다. 당시 막 개발된 CPS3 기판의 위력은 게임 그래픽을 환상적으로 높여놨으나 그마저도 화려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동작의 묘사를 위한 프레임 향상을 노린 결과였다.


블로킹. 마스터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새로 도입된 시스템인 블로킹의 존재였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 레버를 상대쪽으로 순간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공격을 방어해내고 기술입력을 통해 즉시 재반격이 가능하게 만든 이 시스템은 한마디로 너무 난해했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서 레버를 들이댄다는 개념 자체가 지독한 심리전을 요구하는 행위였지만 그런 개념 자체가 당시로선 너무 낯설었고 또한 그 포인트를 맞추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 당시엔 쓸모없다고까지 여겨졌던 블로킹은 그러나 시간이 흘러 뒤로 가면서 고수들이 속속 등장함으로써 블로킹을 터득한 자와 터득하지 못한 자의 갭이 너무나 벌어지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3 시리즈는 스트리트 파이터 본편을 따르는 시스템적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심지어 폐차 만들기 보너스 스테이지까지.

타격감이 살아있는 묵직한 공격과 고도의 심리전. 이 게임은 대전 격투 게임의 본령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세계로 되돌아가려 했던 게임이다. 한마디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었다. 솔직히 나도 너무나 재미없게 플레이했었으니까. 내가 이 게임을 보면서 좋아했던 것은 순전히 노출도가 가장 높았던 엘레나 덕이었다. 그녀의 선택 초필살기중 하나인 힐링은 사용시 닳아있던 라이프 게이지를 3분 1가까이 회복시킴으로써 상대의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데 매우 유용했다.


세컨드 임팩트 자이언트 어택. 엘레나의 초필살기인 힐링의 대폭적인 약화로 즐겨쓰는 캐릭터를 휴고와 고우키옹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이 게임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던 것은 스트리트 파이터 3 세컨드 임팩트 자이언트 어택이라는 길기도 긴 제목을 달고 나온 일종의 확장판 덕이었다. 전통적으로 하나의 게임이 나오면 그에 대한 업그레이드 차원에서 시리즈로 게임을 내놓는 캡콤의 전통에 따라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받은 듯한 제목을 달고 나온 이 게임은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다면 망하진 않았을 거다'라는 평을 들었다. 그만큼 이 두번째 버전은 처음보다 훨씬 대중친화적이었다. 일단 캐릭터가 셋이 더 늘었고 전체적으로 단조로웠던 전작의 색감과 배경에 비해서 이 작품은 훨씬 다채로운 색감의 세계를 보여준다. OST부터 힙합과 트랜스, 레이브 등등 당대의 트렌드를 차용하여 가볍고 신나는 인상을 주었으며 블로킹의 사용이 보다 쉬워졌다. 그리고 엘레나에게 새 승리포즈가 생겼다.... 뭐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그외엔 시스템상으로 변화가 크게 없었고 워낙 전작이 악명을 떨쳤던 탓에 국내 아케이드센터엔 그 모습을 찾기가 사이쿄의 타락천사를 플레이해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또한 대만판 복제 기판으로 퍼질대로 퍼진 킹오파에 비해서 CPS3 기판은 복제가 불가능한데다 망가지면 국내에선 고칠 수 있는 데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비쌌다는 점에서도 게임의 파급력을 떨어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음이다.

내가 이 게임에 뻑 간 것은 이 시점에서부터였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3 세컨드 임팩트 자이언트 어택(헉헉)이 맘에 들었다. 킹오파가 만들어내는 버그와 캐릭터성을 강조한 탓에 벌어지는 밸런스 붕괴에 지쳐있던 나에게 이 게임은 농담을 할 줄 모르는 해군하사관 같았던 전작의 딱딱한 이미지가 없어진 동시에 시리즈 자체가 가지고 있던 평균 이상의 퀄리티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블로킹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이 게임을 맘에 들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돈도 땡전 한푼 없으면서 기판을 사야겠다는 맘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서드 스트라이크. 허벅지 여왕님의 귀환.

스트리트 파이터 3 서드 스트라이크라는, 전작에 비해 훨씬 얌전해진 제목을 달고 나온 시리즈의 세번째 버전이자 마지막 버전은 가히 2D 대전 격투 게임의 정점이라 할만 한 퀄리티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픽, 음악, 밸런스 등등. 전개는 보다 시원시원해졌고 캐릭터는 네명이나 더 불었다. 특히 이미지 캐릭터라 할 만 한 춘리의 가세는 게임의 시리즈적 연속성을 높임과 동시에 올드유저들까지 끌어들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나로선 꿈을 이루기 위해 기판을 두개씩이나 사야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고 말게 됐다. 그게 싫으면 노량진 오락실까지 원정을 가서 플레이를 해야 할 판이었으니.... 쫄딱 망한 덕에 이 게임의 희소성은 그리도 컸다.


드림캐스트용으로만 나온 3 원판과 세컨드 임팩트 자이언트 어택의 합본판인 더블 임팩트. 이제는 중고로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경제적인 평준화를 이끌어내는 법. 영원한 2인자 세가에서 절치부심하여 만들어낸 차세대 게임기인 드림캐스트는 스트리트 파이터 3 시리즈의 컨버전을 차례로 발표했고 나는 드림캐스트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마냥 침을 질질 흘리게 되는 증상을 갖게 되었다....

이후, 내가 드림캐스트를 중고로 구입하게 되는 것은 세가가 하드웨어 산업에서 손을 뗀지도 한참 지나서의 일이었다. 물론, 오직 스트리트 파이터 3 서드 스트라이크를 위하여....

 


스트리트 파이터를 몸소 시전중인 사람들. 이 게임의 심원한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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