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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랑전설 2 - 완결
오시이 마모루 스토리, 후지와라 카무이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야생의 개는 긍지 같은 가치를 모른다. 긍지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인간의 개에 대한 이야기다.
오시이 마모루는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즐긴다. 패트레이버 극장판에서 조직과 사회에 배신 당한 이는 그의 역할을 통해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사회를 향해 유령처럼 역습을 해오고 공각기동대의 공안 9과는 내부의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서 태생에 대한 환멸로 인간과 흡혈귀 양쪽을 증오하면서 흡혈귀의 피를 뒤집어 쓰길 자청한 사야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인물들의 서사극이었던 그의 작품 세계의 결정적인 표상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가장 살아있는 인물이 파멸의 미래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이었다는 걸 기억하자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패트레이버 극장판에서 보여졌던 범인과 대비되는 고토와 조력자들의 유난히 무기력한 '표정'들을 주시하라.) 그의 작품에는 염세주의와 어쩔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모호한 태도, 인간의 역사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뒤엉켜 있다.(공각기동대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이지만 동시에 법가적 세계관을 갖고 있던 원작자와 인간에 대한 환멸이란 측면에서 공유할 수 있었던 의식의 결과일 것이다.)
명백하게 일본 전공투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견랑전설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의 극명한 충돌이 일어나던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파멸에 대한 매혹으로 가득한 개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오시이 마모루의 캐릭터들이 그렇듯 결벽증적 숭고함의 미덕에 끌려 정해진 길로 나아간다. 온통 비장함으로 가득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숙적인 '섹트'뿐이다. 야생의 개는 야생의 개끼리만 알아볼 뿐이라고.
대체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비장함의 미학은 작품을 역사의 자장권에서 빼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는 견랑전설의 공간이 전공투 시기에 머물러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졌을 이데올로기 대립은 오시이 마모루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블러드 시리즈를 통해 이미 장황한 인간 환멸론을 준비해놓고 있었던 오시이 마모루로선 인간이라는 짐승이 가진 의식의 한계를 잠정적으로 결정 내린 상태에서 그와 같은 인간 간의 투쟁이 더없이 저열한 종류의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상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치열했던 투쟁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던 삶들을 치장할 들러리 정도로 격하된다.(물론 오시이 마모루가 무려 두 편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 시기에 매혹된 이유 또한 그 치열함이라는 시대적 진정성 속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여기서 사냥개로 길러졌으나 주인보다 더 나은 긍지를 가진 개들이 가질 우월함에 대한 근거가 주어진다. 개들은 굳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억되고자 한다. 버림 받고 배신 당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긍지를 지키기 위해, 그 완고한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 기꺼기 죽음으로 달려간다.(이 부분이 시로 마사무네와 오시이 마모루가 갈리는 지점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시로 마사무네는 주체가 되는 '나'의 생존을 위한 농담 정도는 충분히 한다. 그에게 있어 삶은 쾌락이고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유일무이의 가치이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가 매혹된 것은 수도승과 같은 완고한 가치관이고 그를 통한 전승에 가깝다. 원작과는 그 분위기가 한참 다른 극장판 공각 기동대에서의 인물들이 그토록 심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매혹은 더없이 쓸쓸하다. 여기엔 영광도 없고 파멸만이 존재한다. 아니, 그들은 기억되기조차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한 존재에게만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오시이 마모루의 전작 속에서 그들의 귀환은 거의 언제나 악몽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이 아웃사이더들의 묵시록은 마지막, 유일하게 살아남은 특기대원 세 명을 실은 차가 어딘가로 떠나면서 끝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는 귀환할 황이처럼, 끝이 아니다. 비록 악몽이라 불릴지라도 그들은 돌아온다. 돌아오기 위하여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