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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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수다가 계속된다. 팝컬쳐 전반에 걸친 저자의 박학다식함은 가히 그 끝을 모를 지경이라 문외한인 이(바로 나같은 인간을 말함이다)에게 이 책은 거대한 서브 컬쳐 매거진처럼 느겨질 정도다. 코드가 맞지 않는 이들에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기호의 잡다한 잡동사니. 바르트가 패션지에서 느꼈던 흥미를 '모드의 체계'로 연결시켰던 것이 기억날 정도다. 하지만 듀나는 '모드의 체계'의 분석 대상인 기호가 아니라 기호를 통해 '모드의 체계'가 되려고 했다.

단순히 SF라는 한정된 영역보다는 서구 환상 문학 전반에 걸친 애정이 드러나는 이 책의 서술 문장은 무척 고전적이라 차분하며, 적당한 블랙 유머와 시니컬함이 가미된, 정확히는 앨런 포의 세계에서 노닐던 러브크래프트도 아니고 문장 자체를 기호로 만들어버리는 윌리엄 깁슨도 아닌 필립 K. 딕이 보여준 적절한 밸런스의 단순 세련된 문장들에 가깝다. 또한 이것은 하드 SF보다는 관념론적인 영역의 탐구를 진행시키는 저자의 스타일에도 기인한 것이리라. 그런데 딕의 작품과 이 작품의 차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인용되고 끌어와지는 팝컬쳐 전반에 걸친 저자의 취향이다. 그 특화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작품집에 실린 각각의 단편들은 과밀한 정보량을 함유하는 동시에 딕의 작품들이 가지는 보편적 정서와는 많이 어긋난다.

작가가 작품 개개에 쏟아부은 노력은 언뜻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은 전통 SF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자신(들)이 경배하는 작품의 구조를 빌려와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나면 어느 작품 하나 진정 새롭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저자가 가지는 태도가 창작자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평가자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특유의 시니컬함의 근거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타란티노에 대한 정확한 평론을 여기에 대입시켜 볼 수 있겠다. '그는 배우들을 이용해 걸작을 만들고 싶어한다기보다는 그들과 같이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고 떠들고 놀길 바란다.' 다만 저자는 열광보다는 비웃음쪽에 더 비중을 싣기로 결정한 듯 싶다. 그(들)은 패스티쉬, 패러디, 키치들로 가득한 자신의 놀이터가 가지게 될지도 모를 모래성 같은 불안함을 알고 있고 그것을 자신이 섭취한 문화 전반에 대한 통찰로 이끌어낸 시니컬함의 철학으로 보완하려 한다. 확실히 삶과 인간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폐부를 찌르는 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임기응변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말빨 좋은 작가의 반응성 좋은 순간 되받아치기 이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건 왜일까. 그것이 작가의 내밀한 사고 끝에 나온 장고의 결과물이라면 잡다한 취향 속에서 휘발된 알콜 같은 모양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확실히 불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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