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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실수, 오해, 그리고 총체적인 어리석음의 결과물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상,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를, 그리고 그걸 움직이게 만든 문명이라고 불리는 흐름을 마땅히 '옳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은 아예 제목부터가 <야만의 역사>다. 이쯤 되면 거의 선전 포고 수준이다. 마음 다잡아라.
스벤 린드크비스트, 우리 나라에선 유독 인기가 없는 이 대머리에 흰 수염을 단 스웨덴 할아버지는 식민 시대의 한 정점을 묘사한 콘래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들고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다. 그러나 잠깐. 머리말에서 밝히는 것처럼 이것은 말그대로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가 전해줄 무게감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제목 그대로, 우리에게 심각한 가치 판단의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바는 명쾌하다. 그리고 또,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되 왔던 우리 인류의 야만에 대한 차갑고 냉정한 기억이다. 과연 야만은 무엇이고 문명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분쟁없이 평화롭게 살고자했던 '야만적인' 공동체와 오직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를 들고 같지도 않은 이유로 학살을 자행한 '문명국' 중 어느 쪽이 야만이고 어느 쪽이 문명인가.
어째서 카인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남아 원죄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덧씌운 인류를 불리는데 기여 할 수 있었을까. 한 편의 거대한 성인용 모험 소설 같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부조리하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운 장면은 죄를 지은 카인을 야훼가 보호하는 구절들일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보호 아래서 살인을 한다? 무의식 속에서, 인간이 저지르는 살인은 어쩔 수 없는 정당한 것으로 면죄부가 씌워진 것인가? 문득 여기서, 19세기 중엽만 해도 식민지 시대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던 독일이 20세기에 이르러서 발생한 두 번의 학살극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논변이 생각난다. 한마디로, 그들은 땅이 없었기에 그렇게 떠벌일 수 있었음을. 그래서 그 '객관적 시선'의 대표적인 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이 19세기 말, 막 식민주의적 경향을 띄기 시작한 독일의 앞날에 어떠한 학문적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글을 기억해 본다.
이 땅에서 지금껏 가장 마지막으로 존재했던 봉건 왕조의 이름은 '대한 제국'이었다. 무척 가망 없는 제목이긴 했지만 부랴부랴 만들어진 저 국호에서조차도 먹느냐 먹히느냐의 절박함을 느끼리란 건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일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제국이 되어' 일본이 되지 못한 걸 개탄하는 인간들도 아직 많다. 부지기수다. 독일보다는 여러 모로 안 좋은 상황이었던 우리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제국주의의 꽃을 채 피워보지도 못한 채 꺾인 것이다. 우리를 지배해 준 일본 제국의 학자들은 그런 우리를 '열등국민이기 때문에'라는 말로 친절하게 요약시켜줬다.... 넌센스.
세계 여러 곳의 신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존속 살인의 이야기. 죽음을 묻고 피를 빨아올리며 발전해 온 문명.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는 똑같은 어리석음. 과연 인간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짐승'이란 말인가. 작가는 인간 본연에 대한 암울한 회의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끝낸다.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미 알아버린 거다. 인간들이 벌인 작태가 주는 분노 속에서 피어오르는, 잊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가? 그것은 용기라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