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성석제는 인간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애정을 가진 드문 작가이다. 인간이라는 고등 포유류가 펼치는 일련의 작태들에 현란한 말빨을 덧씌워 압도적인 웃음을 선사하던 그는 누구나 죽쑨 얼굴을 하고 지내던 지난 세기말을 웃음으로 통과해 낸 거의 유일한 작가다. 그런 그가 이번엔 아주 노골적으로 인간의 힘을 믿는덴다.

그래서 우린 그가 말하는 인간의 힘을 몸으로 체현하는 한 남자를 보게 된다. 예전에 있었던 나라, 조선에 살았다던 그 선비, 채동구가 보여주는 인간의 힘이란 별 게 아니다. 그것은 믿음, 자신이 믿어 지키고자 하는 바를 고집스레 지탱해나가는 인간의 마음이다.

우와! 되게 시시하네! 그렇다. 시시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석제를 아직도 웃기기만 할 줄 아는 작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얘기가 시시하든 말든 그리 상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저 장대한 시골 폭력배의 삶은 따지면 뭐 그리 대단한 주제였나?

그런데, 아! 안타깝게도 작가, 별로 안 웃긴다. 정말 안 웃긴다. 아주 간간히 웃긴다. 이거, 모반이야!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다....

물론 작가 성석제, 웃기는 쪽에 서야 정말 끝내준다. 엄청 웃기니까. 그런데 이 양반, 중간에 간간히 심각한 표정의 외도도 좀 했고 평하는 게 업인 양반들에게서 그럭저럭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그 외도들, 내가 보기엔 영 아녔다. '그려.... 그만 됐으니 이젠 좀 웃겨주슈. 딴집 가니까 뻘쭘하잖어....' 이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 인간의 힘은 아니다. 제대로 웃긴다. 아, 그래 제대로 웃긴다니까 파안대소를 따발총처럼 내뿜을 수 있는 개그를 선보인다는 거냐, 그건 아니다. 여기서 제대로 웃긴다 함은, 작가가 자신의 호흡을 관장하는 법에 있어서 멋진 경지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즉,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유 있게 웃겨준다.

작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막말로 말해서 평생 웃기기만 할 건가? 성석제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분명 양날의 검이었다. 뻔한 말로 틀에 박히는 게 싫어서 외도도 해보고(여기서 쓰는 외도라는 말이 진짜 웃기는 말이다.) 그런 거 아닌가. 그리고 이 양반, 본래 시인 아니었던가. 그의 입담은 언어 작용의 결정체라는 고결한 수사 따윈 집어치더라도 어쨌든 필살의 한방으로 구현될 언어를 위해 다듬어진 것이지 웃길려고 다듬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웃긴다 라는 틀에 작가 성석제를 가두는 일이야말로 진짜 모반 아닌가.

아무튼 작가, 딱 적당하게, 안정된 호흡을 쉬어가며 채동구라는 양반의 삶을 다룬다. 어, 근데 이거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글쎄 채동구, 명나라 만세 외친다. 네 번씩이나 벌였던 그 초라한 가출들의 목적도 유학도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다. 어, 이거 수구 아냐? 보수 아냐? 한심하기론 조선 사대부 500년 역사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고 주변에 다양한 민폐나 끼치는 이 한량이 인간의 힘이라니? 100년 전 쯤이면 시대의 한심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졌을 이 양반을 온갖가지 이데올로기 및 그외 다양한 태클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에 활자로 된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작가의 의도는 대체 무엇일까. 설마 몰랐던 걸까?

이거, 민감하다. 작가는 분명 인간의 힘을 말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그것이 과연 마땅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강직함, 곧음. 하나의 신의를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청렴함. 그런 이름 없는 이들이 모여 이루는 커다란 가치가 인간의 힘이라는 것까진 알겠다. 그것이 이 혼란스럽고 가치 없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납득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필 끊임없이 그 가치의 정당성을 물어야했던 이데올로기의 한복판에서 벌인 유학생의 내가 옳다 식의 분투기라면, 소재의 태생적 불운인 동시에 재고의 여지를 두게 될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문득 움베르토 에코의 돈 키호테인 바우돌리노가 보여준 신화적인 세계에서의 열정과 자유스러움이 부럽게 느껴진 것은 이것이 인간 의식에서의 모험이어야 마땅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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