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마 클럽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시공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원작자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문학 이론에 관심이 없다고 천명하고 베스트셀러라는 것들도 여느 소설들과 같이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가지는 엄청난 정보량과 난해한 구조를 예로 들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 작가, 그렇게 말해놓고는 정작 작품은 엄청난 양의 문헌학, 역사학적 정보를 쑤셔놓은 괴물덩어리를 내놓았다.

그런데, 야심찬데다 대중적 성과도 좋았던 이 작품은 들어있는 그 방대한 정보량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정보들이 잘 혼합되어 제대로 숙성을 이루어냈다는 인상을 찾기 힘들고, 오히려 매니악한 유희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작중에서도 몇 번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던 움베르토 에코의 그것과는 꽤 틀린 점인데, <장미의 이름>이 중세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한 현학적인 정보-지식의 유희를 토대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내고 그것을 온갖 가지 관점에서의 텍스트로 활용 가능하게 승화시켰다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 나오는 뒤마의 키워드와 문헌, 역사적 정보들은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재고해 볼 필요도 없이, 작가는 뒤마의 열렬한 팬이다. 현대 대중 소설의 서사 양식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는 정력 좋은 거장에게 프로페셔널 대중 작가를 자처하는 그가 그렇게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책에 대한(말그대로 책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 또한 갖고 있다. 이 두가지가 <뒤마 클럽>을 이루어낸 핵심으로 그 애정은 공통적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에의 매혹으로 그 시대에 대한 지지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까지 에코와 레베르테가 가지고 있는 재료의 종류는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모든 것은 틀려졌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에코는 재료를 살려내려고 한 반면, 레베르테는 재료에 대해 떠들려고 했다. 한 쪽은 이 재료를 조리하면 얼마나 맛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지만 다른 한쪽은 재료가 얼마나 맛나고 훌륭한 것인지 떠들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 차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을 주제로 했다는 시학 2권은 엄연히 실재하면서 그 텍스트 자체가 갈등의 핵심에 배치되어 있지만 '앙주의 포도주'는 실재하긴 하지만 뒤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뒤에 가서는 아예 뒤마에 대해 떠들기 위한 꿈의(작가 관점으로선 말이다) 클럽마저 등장시킨다. 그 구성원 중에 움베르토 에코(로 추정되는 인물)가 껴 있는 것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가리켜 '죽이는 소설이다. 완전히 끝내주게 만든다.'라고 그 할아버지가 말했던 것을 미뤄 생각해 볼 때 꽤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그 양반이 <장미의 이름>에서 같은 종류의 재료를 얼마나 멋드러지게 다루었는지를 기억하자면 작가가 엉뚱한 데서 헛짚고 있다는 인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다른 한 축인 '어둠의 왕국으로 가는 아홉 개의 문'이 얽혀 들어가 있다는 걸 뒤마의 그것보다 더 빈번하게 느낄라 치면, 산만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레베르테란 작가는 글쓰기에 있어서 확실한 전문가다. 자료 수집에 있어서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량과 철저함,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독서광으로써의 열정. 인터뷰에서의 당당함의 근거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 또한 그것에 있었다. 읽는 이로서의 즐거움과 말하는 이로서의 즐거움을 혼동한 것이라고나 할까. <뒤마 클럽>은 쉽고 재밌는 소설이어야 한다는 신념, 자신의 애정의 대상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 매니악함과 대중성 사이의 공간을 철저한 자료 수집(소위 지적 욕구를 만족시킨다고 표현되는)을 통해 절충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식이, 그저 백과사전을 만들어낸다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걸 반증한 듬성듬성 이가 빠진 바벨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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