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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ㅣ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대개 영화를 먼저 본 이들에게, 그래픽노블로써의 [브이 포 벤데타]는 우선 시각적으로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효과음은 사라지고 화려하거나 역동적인 동선은 배제된 채, 엷은 채색이 모노톤의 거칠고 적적한 질감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만드는 삭막한 감각으로 이뤄진 이 짧지 않은 이야기(296페이지에 꽉 차 있는 그 수많은 대사들)는 참 음울하게도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시나리오로 컨버전하면서 워쇼스키 형제-아직 남매인지 형제인지 잘 모르겠다-가 브이를 보다 더 현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캐릭터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된다.
독재권력이 지배하는 파시즘국가라는 배경은 오래 전부터 이야기의 소재로 쓰여왔던 바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 소재가 역사적으로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바라는 건데 그런 익숙한 패턴에 맞춰서 독재자들의 성깔 또한 비슷비슷들 했다. 그들이 흔히 저지르는 모순은 개인의 희생을 통한 공공의 이득을 절대적인 이데아로 주장하면서도 자신을 공공과 동일시함으로써 사회를 자신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 혹은 특정 커뮤니티의 유희장소로 만들어서 걷잡을 수 없이 다양한 갈등요인들을 파생시킨다는 점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의 권력의 핵인 '리더' 또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다.
앨런 무어의 다른 작품인 [왓치맨]을 먼저 접한 이들이라면 깨달았겠지만 [왓치맨]은 공공의 이득을 꾀한다는 수퍼히어로들이 가진 힘이 수반하는 개인적이고 정신병리학적인 컴플렉스들이 빚어내는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기도 했다. [왓치맨]에서의 그런 성과가 떠오르게끔, [브이 포 벤데타]에서의 텍스트는 독재권력의 각 부분을 맡는 상징들의 개인적인 내면으로 파고들어간다. 힘에는 책임 이전에 자연파생물적인 문제가 따라온다는 이 판단.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는 권력을 이루는 병적인 객체들에게 촛점을 맞춤으로써 병적으로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해부를 시도한다. 영화에선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며 그래서 문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강철 같은 의지덩어리이자 순환하는 흐름의 상징인 브이와는 달리 그들은 하나같이 나약한 의식덩어리들이다. 개인적인 약점이 너무 많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보이게끔 만들어야 했다. 쉽게 말하자면 비뚤어진 허세. 그들로 이뤄진 권력이기에, 권력은 압도적인 지배자라기보다는 욕망덩어리들이 내부에서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키는 불안정한 집합체다. 현실적으로 그를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기록을 통해서 역사상의 위대했다던 독재자들이나 독재권력에 속한 인간들이 대개는 얼마나 부실했던 인물들이었는지 잘 안다. 그들은 대개 욕망과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비슷한 패거리에 의해 눈과 귀가 멀어있었다. 그들에겐 무지막지한 아집은 있되 타인에 대한 이해력은 없었다. 이해력의 상실은 듣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고 듣기 싫었던 거였을 수도 있고 둘 다 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불완전한 그들에게 권력을 줬는가. 바로 군중이다. 예쁘게 표현하자면 민중이다. 사회적 다수의 합의가 불완전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어준다. [브이 포 벤데타]는 멈추지 않고 파시즘의 가장 결정적인 영역, 즉 어떤 카리스마 있는 소수의 탁월한 정치 능력이 아니라 다수의 합의로 성립되는 독재국가에 대한 고발을 감행한다. 그리고 익숙한 타성을 헤어나오라고 경고한다. [브이 포 벤데타]를 SF물의 범주에서 만족시키는 요소들에는 대체역사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각성과 진화를 촉구한다는 전통적인 주제 또한 포함된다. 흔히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박정희의 능력에 대한 몰아주기식 찬사의 반대 의견으로써 그 발전상을 당시 민중의 힘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파시즘을 보는 시선 또한 그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을 선택한 모두인 것이다.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가 군중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이지는 않다. 여기서 그려지는 폭발한 직후의 군중들은 무저항 비폭력 코스프레 거리 대행진이 아니라 보수 언론이 좋아하는 단어를 차용해오자면 '폭도'에 가깝다. 데이비드 로이드의 시커먼 작풍은 말미에서 그 분노한 군중이 만들어내는 거친 감성과 폭력을 차갑게 그려내고 있으며 당연한 얘기지만 별로 아름다운 편은 아니다. 그러나 브이는 그것을 수순으로 본다. 개인적 다수의 동시자발적 각성이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오버로드가 지구에 나타날 필요도 없는 것.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의 결말은 변화가 있되 마냥 밝지만은 않다. 그 또한 변화를 일으킨 이들의 몫이기에, 아직 해가 뜨기엔 먼 밤을 보여주는 결말은 적절할 수밖에 없다. 이 마지막은 말하자면 기다렸던, 혹은 낭비해버려야 했던 시간의 복수극인 셈이다.
-28페이지 #3에 표기된 '라이트윙 세력'이 뭔가 해서 처음엔 훌리건들이 정치조직이라도 만든 건지 싶었다. 답은 간단하지만. 라이트(우)+윙(익). 왜 직역을 안한 거지....
-두껍고 튼튼해뵌다는 게 일단 만족스러움.
-이 한국어판의 존재에 대해선 RATM의 사례를 유머러스하게 얘기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