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나왔던 건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누군가가 CIA에 대해서 얘기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대략 내용은 이랬는데, 지금까지 CIA가 한 걸로 얘기된 것들을 모조리 합치면, 미국보다도 더 강한 국가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만큼 일반에 퍼진 CIA의 사업이란 것이 과장되었다는 얘긴데, 이 책에서 보면 이미 60년대 말에 서반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CIA가 한 일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하니 그 연원이 상당히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설된지 20여 년만에 이룩한 브랜드 밸류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죠.
굉장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CIA의 역사를 중심에 두고 미국의 역사를 재편한 이 논픽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몰랐다, 실수했다, 성공적이지 못했다, 거짓말, 위험한' 정도로 뽑아볼 수 있을 거 같네요. 지독하게 방만한 조직이었던데다 예산낭비란 어떤 것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CIA의 60여 년 역사에 대한 통렬한 고발인 이 책은 2000년대가 넘어서야 겨우 기밀해제가 된 일련의 보고서들과 기록들을 바탕으로 감춰졌고 포장되었던 사실들을 캐보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올곧게 비판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도저히 비판하지 않을 수가 없는 한심한 사건과 얼빵한 수습들의 연속으로 가득 차 있거든요. 겨우 기밀에서 해제가 된 것만으로도 이정돈데, 과연 편법까지 동원해가면서 해제가 안된 것들엔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해지네요. 그중엔 1950년대에 북한에서 벌였던 비밀공작도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 깡옛날에 거기서 대체 뭔 사고를 터뜨렸길래.
케네디 형제가 비밀공작에 환장한 사람들이었고 CIA를 주물떡거리면서 카스트로를 어떻게든 죽여버릴려고 무진 애를 썼다는 건 여기서 처음 알게 된 건데, 그런 케네디와 린든 존슨, 닉슨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한마디로 그놈이 그놈이란 입장입니다. 이건 CIA의 역사를 기준으로 봤기 때문에 도출가능하게 된 결론일진데 한마디로 케네디 형제가 한 일은 그 이후 이뤄질 극우세력 옹호 차원에서의 비밀공작들의 길을 닦아놓는 거였다는 거죠. 그러니 CIA가 케네디 형제의 암살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음모론은 좀 거시기한 게, 그 CIA가 케네디 형제의 수중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뭐 사내정치적인 차원에서 제거된 걸 수도 있을려나. 암튼지간에 CIA는 오스왈드의 동선을 알고 있었다니. 그런데 여기서 나열된 사실들을 보면 그런 걸 알고 있었어도 그냥 관심없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진 않을 거 같습니다 CIA란 조직은.
철철 넘쳐흐르는 자료들에 장정도 튼튼해뵈고, 전복과 재조립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거의 필수적으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자잘한 오타가 많은 게 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