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 세미콜론 코믹스
아사노 이니오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를 다 읽고 난 뒤에, 난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이 작가는 여기까지 해냈구나. 여기까지 이르러서 문제를 직시하고 있었구나. 그렇다.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상찬받아야 마땅한 위치에 다다라 있다. 

거의 2년에 걸쳐 [퀵저팬]에 연재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선데이GX]에 연재됐던 [빛의 거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우울한 이야기는, 간단하게는 [빛의 거리]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나 간단하게 그 근거를 설명하자면 두 작품이 각각 품고 있는 빛과 어둠이라는 두 이미지의 대비로 그 근거를 댈 수 있겠고, 또 두 이야기가 어른과 다를 바 없는 어린이들의 부조리한 사정과 암울한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작품적으로만 본다면 [니자가하라 홀로그래프]는 다소 미숙한 면모가 보였던 [빛의 거리]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가 있는, 명백히 진화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에 쓰인 이야기 장치들은 그리 낯설거나 신선한 것은 아니다. 되려 그것들은 클리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빈번히 쓰인 장치들이다. 장자의 호접몽, 어두운 하수구 터널, 이지메, 근친상간, 끝에 가서 결국 근원으로 돌아오는 캐릭터들. 물론 도식화됐다고 볼 수 있는 소재들을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보편타당한 영역의 소비범주를 구축해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의 소재적 도박은 작가의 연출력에 그 생명을 맡기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아사노 이니오의 능력이 빛나고 있다. [빛의 거리]에선 다소 거칠게 쓰였던 것들이 여기선 완벽하게 통제되면서 특유의 탄탄한 작화와 다분히 영화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연출로 드러난다. 그저 단순히 청춘의 극복과 성숙이라는 뻔해질 수도 있는 소재를 가진 [소라닌]이 탁월한 흡착력과 더불어 어떤 새로운 발견으로서 다가올 수 있었던 게 장르를 장악하는 아사노 이니오의 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보자면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 또한 또하나의 증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흔히 실험적인 만화에서 볼 수 있는 폐쇄적인 난해함과 거친 치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저 어지러운 의식의 표상이 아닌, 여기에는 설명하고 얘기하고자 하는 광기의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뻔하게도 청춘의 두려움인가? 부분적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에서의 불온함은 청춘 이전에 그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 태생적 광기에 대한 얘기다. 이것은 보다 보편적인 영역에서의 해석을 요구한다.

명백하게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재난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의 중심무대가 되는 니지가하라에는 재난을 미리 알려준다는 구단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마치 역병처럼, 이 이야기에서 사고와 폭력들은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이유없는 폭력과 사고는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장치된 것들이며, 그 근원적으로 장치된 악몽을 향해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도시의 땅밑에 흐르는 하수구 속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도시는 많은 것들을 감춘다. 그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면서 이룩한 세련된 문명의 배려이기도 하다. 하수도 정비가 되지 않아서 구역질 나는 진창이 널린 중세 거리와 돼지우리와 함께 살았다던 근대의 풍경에선 느낄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깔끔함.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야만이라고 부르면서 거부한 자연스러운 것들을 세련 뒤로 감춰버렸다. 간단하게, 지금에 와서 소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살아있는 소와 돼지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퍼의 냉장코너에 예쁘게 포장된 소세지 덩어리가 되어있는 걸 봤을 때, 그 동물들이 어떻게 찢어지고 분쇄되서 그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를 자각하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에서 광기의 연원은 우리가 감추고 싶어한 무언가에 대한 지독한 설명으로 추출해낼 수 있다. 어둠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왔다. 광기는 그 자리에 있는 걸 지우려 한 시도로 파생된 어떤 틀어짐에서부터 시작된다.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그래서 표피에 드러난 악몽의 풍경화를 쫓는다. 여기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욕망과 폭력들은 결국 인간의 의도라는 것에 대한 얘기다. 결코 간단해질 수는 없지만 지극히 단순하게 드러내질 수 있는 것들. 이 이야기가 꿈결 속의 한 영역이라는 게 가장 간편한 설명일 수 있는 건 바로 그때문이다. 꿈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욕망인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보기 싫어서, 언제까지나 자는 척하고 싶어하는.

하수도에 빠질 때까지 그 더러운 냄새를 느낄 수가 없는, 그런 것에 대하여 [니지가하라 홀로그래프]는 뻔하지 않으면서도 친절한 혼돈으로 답해준다.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충분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곧, 경험으로서의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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