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베헤가 1998년에 녹음한 베토벤 9번 교향곡에 관해선 지지와 경멸의 각 영역에 걸쳐 여러 이견들이 있지만, 우선 정격연주에 능통한 지휘자가 절대적 지위에 오른 교향곡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절대적 지위라는 건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수없는 변주와 더불어 어떤 고정된 전통 비스무리한 게 있다는 뜻으로 봐도 될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며 만들어졌다는 고결한 동기,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드라마틱한 구성력, 대중에게 충분히 익숙할 정도로 반복된 레파토리의 횟수와 비중 등은 이 유명한 교향곡을 거의 경전을 대하다시피 하게끔 만들었고 그 결과로 드러난 거대하고 화려해서 에너지가 넘실거리다 못해 철철 넘쳐 흘러내리는 것 같은 '베토벤다운' 해석들이 꾸준히 있었다.

누군가는 그 '베토벤답다는' 리스트에서 구도의 길을 발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그건 거들먹거림으로도 느껴졌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 처음은 가디너가 문제였던 거 같다. 정격연주로 진행된 그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은 신선했으며 센세이션도 불러 일으켰지만 '베토벤다운' 전통을 고수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비판받았다. 맥아리가 없고 음이 가볍다는 축이었다. 여전히 그쯤의 평가를 받기도 하고. 그리고 이후 정격연주에 대한 어떤 편견이 생겼다. 정격연주로는 음의 드라마틱함이 줄고 힘이 없어진다는 것,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 의견은 헤레베헤의 이 연주를 대하는 어떤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헤레베헤는 절대 거들먹거리지 않는다. 그는 이 앨범에서 정격연주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을 충분히 기쁘게 만들 정도로 곡 안의 모든 흐름과 동기들을 가차없이 진행시킨다. 어떤 이는 그것을 헤레베헤가 내세우는 학자적 연구에 의한 냉정함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그런데 헤레베헤의 그런 태도가 비아냥 받을 대상이 되는 이유를 나로선 잘 모르겠다. 그 타협하지 않는 냉정함으로 빚어진 미학은 정격연주 전문 지휘자의 그저 그런 베토벤 해석으로 비난받아야 할 정도로 속빈 것이 아니다. 난 이 앨범에서의 3악장이 들려줬던 것 만큼의 정갈한 아름다움을 다른 지휘자들의 연주에선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뒤로 빠르고 다이내믹한 에너지로 단단하게 짜인, 어떤 빛나는 시작으로서의 4악장이 기다리고 있다. 시작으로서의 9번 교향곡. 그렇게 거꾸로 시작해서, 헤레베헤는 10여 년이 지난 이제야 로열 플레미시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을 완성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앨범을 1990년대에 대한 결정본적인 인화라고 본다면, 그 또한 꽤 흥미로운 시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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