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류의 소설 중 가장 능글맞으며 여유가 넘치고 SM과 와인이 등장하지 않는 [69]를 처음 본 게 이제 거의 10여 년 전 얘기다. 당시 난 [69]의 등장인물들처럼 고등학생이었다.

내 고교생활은 그냥 껄렁껄렁했던 것으로, 실수도 했었고 병신짓도 했었고 시간낭비도 했으며 좋은 친구들과 약삭 빠른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쁜 친구는 별로 없었고, 전반적으로 그리 신나진 않았던 것 같다. 뛰어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리케이드 같은 개념은 커녕, 당시의 난 정치적으론 무지했다. 더럽게 가난했기 때문에 IMF가 터져서 세상이 망한다 해도 별 느낌은 없었다. 이미 망해서 망그러져가고 있었던 걸. 여름에 비가 내리면 지붕이 되어 있던 양철판 사이로 물이 새어들어와 벽지를 적셔서, 몇 년이 지나자 내 방은 커다란 곰팡이 서식지가 되어 있었다. 겨울에 잠에서 깨어나서 숨을 쉬면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입김이 보였다.

난 그때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만화와 록과 에로게임에 미쳐있었고 망한 비디오 가게나 동대문 비디오 도매상에 들어가서 엉망진창으로 편집됐지만 지금처럼 전세계 웹하드를 뒤지고 다니는 세상이 아녔던 탓에 희귀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를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입시에 대한 고민이 아주 없었다고 하면 뻥이지만, 불안해 하면서도 난 친구랑 쉬는 시간에 체스를 두거나 교내 덕후 커뮤니티를 통해 불법 복제 비디오를 빌리거나 수업시간에 책상서랍 속에 박아넣은 소설을 몰래 읽는데 더 열중했다.

[69]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좋은 자위감이었던 시절을 거쳐서 SM 연대기를 지식 습득 차원에서 더없이 흥미롭게 읽어낸 다음에 그 언젠가의 수업시간 동안에 보게 된 소설이었다.

재밌었다. 짧고, 발랄하고, 유희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까지 소설로 내 머릿 속에 구축되어있던 무라카미 류답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흘러 다시 읽게 된 [69]는, 어째 그때의 기억만치로 즐거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면 ~겠지만' 패턴으로 설명 가능한 말빨 유머도 나이가 들었는지 눈에 안 차고, 결국 이 소설의 끝에 도달해 있는 건 어떤 종류의 허무함이다. 회고라는 건 지나가버린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 아니던가. 그것의 시작은 복원이라는 속성상 필연적으로 욕망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욕망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69]가 보여주는 에너지가 넘치는 복기도 그 결말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 아닐까. 어쩌면 그건 이 쾌락주의자의 소설에서 본능적으로 보장되는 최소한의 씁쓸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때는 이 소설이 그저 즐거웠다 라는 기억으로만 남아있을까.

청춘은 절망을 보장한다. [키즈 리턴]의 주인공들은 시행착오와 자해극을 거치고 난 다음 우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느냐고 웃어보인다. 그건 잔혹한 얘기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희망을 말하고 있기에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 자체가 의미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시행착오와 추락을 반복해야 하는 순수한 고통일 수도 있다. 그 예측되지 못할 미래가 확고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씁쓸함, 생으로부터의 자학인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성공한 작가가 되서 윔블던 테니스장과 각 지방의 가장 이쁜이들만 나오는 클럽을 쏘다니는 팔자가 됐지만 말이다.

정말로 10년째인지는 솔직히 정확치 않지만 아무튼 세월이 이렇게 흘러와버린 것을 느꼈다. 그냥 그런 거다. 마치 이 소설처럼.

문득 얼마 전에 친구가 10년 후의 우린 어떻게 되어있을까를 물어왔던 것이 기억난다. 글쎄, 그냥 그렇겠지 뭐.

아, 근데 그 질문 10년 전에도 들었던 거 같은데.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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