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헤이번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아이스 헤이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블루벨벳]의 마을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익숙하다. 데이빗 린치가 일찌감치 간파했던 그 병적으로 평온한 마을의 근저에는 알 수 없다기보다는 알기 싫었던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대니얼 클로즈는 데이빗 린치의 괴이쩍은 시선이 빚어내어 이후 모종의 컬트적 아우라를 구축해낸 불길한 소도시 이미지를 차용해오지만 그저 그 지점으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가 차별화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만화라는 장르 전통에 기댄 양식적 분열이었다.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듯 [아이스 헤이번]은 각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인물과 사건에 맞춰 개개의 스타일을 달리 한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들의 주체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아이스 헤이번]이 분열된 거울상임을 천명하는 것과도 같다.

만화비평가, (자칭) 계관시인, 이기적인 아이들, 탈출을 꿈꾸는 소녀들, 탐정 부부 등으로 이루어진 [아이스 헤이번]의 인물군은 작가 특유의 무심한 시선에 실려서 각자의 너절한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하나같이 지리한 생활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벌어지는 유일한 사건이라면 마을의 음침한 아이 데이비드가 실종되는 일이다. 작품 내에서 액자 구성으로 제시되는 유괴범죄 실화와 비슷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처음엔 전체적인 이야기가 때되면 틀어주는 범죄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자극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예상도 됐지만 기실 데이비드 유괴사건은 [아이스 헤이번]을 끝까지 관통하는 맥거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그 이전에 아이스 헤이번에 거주하는 인물들 중에 데이비드의 실종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구조적인 관성으로서의 진실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소비에만 집착한다. 알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를 귀찮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 빠지는 인간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드라마 동기의 기본인 갈등은 어떻게 제시되는가. [아이스 헤이번]의 삭막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자질구레한 갈등 장치의 정체는 그들 모두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망상행위'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망상을 갖고 있다. 생활사적인 욕구, 성욕, 명예욕, 변신욕 등등을 안고 드러나는 각자의 망상들은 그들이 장차로 가지고자 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선이미지화된 허상의 욕구들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욕구는 실제로 드러나 '빗나가버림'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리얼할 수 있는 이유는 우울한 마을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들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서 제시되는 추상적인 아이콘들로 구축된 세계가 우리 세계와 진한 정서적 동질성을 확보해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망상조차도.

모든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그들은 모두 변화된다. 인간 자체의 변화라기보단 상황적 측면에서 풍파를 맞이한 인물들은 이런 류의 이야기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맞이하며 그냥저냥 무대 뒤로 사라진다. 그런데 [아이스 헤이번]이 구조적으로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이르러서다. 처음과 끝부분에 나오는 만화비평가의 해설은 이 작품이 스스로 알아서 모든 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만화비평가 장치는 친절하게도 모든 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이기에 되려 답을 감추는 장치다. 언뜻 스스로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는 액자 구성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 비평가마저도 제삼자가 아닌 아이스 헤이번의 구성원이란 점을 기억하라. 그는 '확실하게' 아이스 헤이번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다. [아이스 헤이번]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봐야 하는 인물은 끊임없이 내부의 구조들 속에서 달아나는 이다. 오직 그만이 '변화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떻게보면 [아이스 헤이번]은 그 누군가의 백일몽 속에 구축된 전지적 시점의 망상 모음집과도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아이스 헤이번]의 진정한 예리함은 이야기들의 단락이 아니라 전체적인 '책'을 통시적으로 봤을 때만이 발견할 수 있다. 끝을 맺는 [아이스 헤이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읊어지는 '시적 승화'는 어떤 종류의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짜인 농담이 그렇듯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달콤하진 않지만 정교하고 날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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