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듀나의 작품들이 꾸준하게 실망을 줬던 이유 중엔 그 이름에 부여되고 있는 몇 안되는 현역 활동중인 국내 SF작가라는 딱지에서도 비롯된 바가 있다. 그 정치적으로 중차대하고 무게감 팍팍 나가는 간판에도 불구하고 듀나의 글은 영상시대의 셀러브리티-스노비즘을 지향하는 면모를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작품 근저에 개인 취향에 따른 정보유희에 기반한 오타쿠적 신변잡기 인상, 그래서 품게 되는 일말의 가벼움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무겁디 무거운 간판을 듀나가 달아달라고 해서 단 건 아니지만 독자 입장에선 그만큼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듀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기대감이 온전하게 채워진 적은 없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아도 그 착상이 충분하게 활용된 바는 썩 없었고, 호흡 조절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는 듯한 플롯이랄지 현학적이라기보단 수다스럽다는 차원에서 과잉스러운 문체, 대화에서 너무 빈번하게 쓰이는 "~니?" 어미가 새침스럽게 만들어내던 구어체와 문어체 사이의 어색한 경계감과 같은 것들은 반복되던 문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의 이]는 듀나의 단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집이다. 그러나 또 실망만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의 이]는 듀나의 확고한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집이기 때문이다. 물론 [너네 아빠 어딨니?]에선 듀나 특유의 스노브적 글쓰기를 재확인할 수 있다. 건너 뛰어서 [용의 이]는 전반부의 압도적인 흥미진진함을 후반부에서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는 썩 아름답지 못한 균형미가 느껴지며 보너스로 저 "~니?" 어미 대화가 등장해준다(트라우마). 그러나 거기까지.

[용의 이]의 창작과정에서 나왔다는 [천국의 왕]과 [거울 너머로 가다]는 세련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B급 공포영화와 고리짝적 소프 오페라, 스페이스 오페라의 세례 속에서 탄생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두 이야기는 어지간히 머리 쓴 참신한 설정들과 더불어 장르의 자기반성에 느슨하게 기대면서 듀나가 마침내 가지게 된 작가적 절제를 통해 추출된 반짝거리는 유희와도 같다. 그 소재적 완성도들은 [용의 이]에서도 이어지고 있는데 백년천년을 살았을 지 모를 무심한 소녀의 시선을 통해 외딴 행성의 세계를 그려내는 데 있어서 듀나의 스노브적이며 통시적인 문체와 성향은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설정적인 면에서의 (더쿠적) 철저함으로만 국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 클라크는 '라마'의 내부를 그리는 데만도 한 권을 다 써버릴 수 있었다(그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SF에서 발명에 가까운 개념의 개발은 플롯을 끝까지 끌고 갈 수도 있는 중요한 동력원이라는 걸 확인한 이라면 [용의 이]가 보여주는 듀나의 성과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에 더해 [용의 이]의 전반부에서 확인되는 건 장편소설 작가가 가져야 할 긴 호흡으로서의 미시적 감각 서사를 통한 성공적인 서스펜스의 포착이다. 그 가능성은 듀나에게 비로소 '다음'도 기대해 볼 만한 SF작가라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하다.

물론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자잘한 불만거리들은 있다. 구성적인 면에서 본체에 가까운 장편보단 장편의 파편이 세공되어져 만들어진 단편의 힘이 더 강력했다는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앞의 작품집들을 실망스럽게 읽었던 나에게 있어서 [용의 이]가 보여주는 분명한 발전상과 성과는 충분히 흥미롭다. 그 미래에 점수를 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