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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인격탐정 사이코 1 - 아마미야 카즈히코의 귀환, NT-novel
오츠카 에이지 지음, 서범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노벨라이제이션화는, 오츠카 에이지의 입장에서 보면 적당한 책임의식이 가미된 모종의 상업적 흐름과 썩 기대는 않지만 자신의 사고 영향력의 확장을 꾀한다는 두 축을 두고 쓰여진 듯하다. 그래서 책의 발매 경위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시작을 알리면서 서두를 마감한 이야기는 3권에서, 이라크전쟁의 의미를 두고 아사히신문 기자와 설전을 벌이면서 결착을 못 낸 것이 못내 아쉬운 오츠카 에이지의 정리로 끝난다. 여기서 내가 굳이 이야기라는 범주 속에 그 모든 것을 통째로 아우른 이유는, 나로선 그 저자 후기까지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큰 이야기, 혹은 의식체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츠카 에이지는 그 모든 것에서 넘쳐나도록 자의식을 드러낸다. 그것이 오오에 키미히코라는 화자가 진행하는 소설 부분에서든 저자 후기라는 부분에서든,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정에 가까운 목소리다. 목소리는 극을 진행하면서는 상황을 폄하하고 의미를 축소시키며 이면에 감춰져 있는 저열하고 별볼 일 없는 진실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후기에서 목소리는 독자에게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얘기한다. 겉으로 보이는 의미를 넘어 서서 사고를 확장하고 행동을 취하라고 말한다.
소설 본편과 후기까지를 이르는 태도들은 오츠카 에이지의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모종의 계도적 인상이 일관되게 풍기면서 굳이 라이트노블을 선택해야 했던 저자의 의도에 의한 구분의 틔미함을 형성한다. 어떤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이 소설이 속한 매체적 특성에 대한 자기반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라이트노블이라는 상업적으로나 장르적으로나, 그리고 수용층에 있어서나 굉장히 애매한 포지션에 자신을 위치시켜 놓으면서 저자는 이것이 도착지가 아니라 다른 길로 나아가는 하나의 다리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라이트노블이란 장르의 한계를 명백하게 인지하고 거기서 머물지 않게끔 하려는 나름의 의도다. 마치 일본만화가 데츠카 오사무 이래로 갖게 된 그 데포르메적 포맷이 갖는 숙명에 가까운 의미의 퇴행적 파쇄현상과 자기유희화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고민했던 것처럼.
그리고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특성상 작가의 속내가 드러나는 후기라는 선까지 보지 않으면, 인간의 본능에 살인이란 것이 마땅히 들어있어서 당연스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 작중 화자의 말과 인간을 죽이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이 되가는 것에 대한 저자의 우려가 어떻게 상충하는지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세계 자체가 이죽거림을 체화한 날선 풍자며 소용으로 보자면 엉뚱하게 지지하는 이마저도 낚으려는 의도로 충만한 결과물이기에 그 상충하는 부분은 해리성 장애의 영역이 아닌 비판으로 향하는 유기적 흐름의 일환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 책은 가상의 냉소적 독자가 가지고 있을 망가지거나 부족한 사고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말마따나 처음 시작이 나온지 십년이 넘은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낡은 이야기이며(사실 다중인격이란 현상의 유행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소재기도 했다. 다만 당시에 제기되던 오타쿠의 분열증적 자기정의와 관련한 논의에 있어서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의 출현은 폐부를 찌르는 바가 있었다) 같은 시간, 아직은 불안정한 존재였던 소년소녀들을 위해 함께 달려갔던 이야기였다. 아직 약을 먹을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꿀을 발라놓은 컵처럼.
다시 돌아가자면, 작가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써, 보고 버리기 위한 산물로써 이것을 만들어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렇다. 라이트노블이라는 펄프픽션적 성격을 필연적으로 가지는 매체를 선택한 것에서부터, 소비재로서의 소설을 얘기하는 그에게 현실은 냉정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조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소비 자체가 사고의 목적을 이루는 바도 있다. 잔인한 얘기지만 프랙탈 이론으로 인해 안겨지는 죄책감처럼 우리의 동선을 역으로 파고 들어가면 끝이 없는 원죄의 영역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과연 선한 나라인가. 우리가 먹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콜럼비아 커피농장 아이들의 피가 얼마나 담겨 있을까, 설탕이라든지 소금의 말도 안되는 원자재 가격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인정하자. 조금만 위치를 바꾸면, 우리는 산더미 같은 죄 위에 서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 자체가 죄의 광막한 시스템의 말단이며 또 시원이 된다.
어떻게 보면 소비를 통해 우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반성의 단초에 서게 된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항할 가치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츠카 에이지는 징검다리가 될 [다중인격탐정 사이코]를 아마존 밀림을 깎아먹는 환경재해의 말단으로써 부정하는 것이 아닌 최소한의 쓸모있는 의미로써 받아들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을 향하는 행동이야말로 그 대답이 된다.
'허나 예를 들어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영혼의 진실을 엮어낸 것이어야 할 책에도 바코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바코드가 찍혀서 통용되는 같은 이야기, 같은 음악을 몇백만이라는 숫자로 미친듯이 소비하고 있음에도 누구나 다 그 이야기나 음악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건 우리의 마음이 이미 대량생산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량생산된 이야기, 대량생산된 음악, 대량생산된 사상, 그것은 당신들의 마음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당신들의 마음에 바코드를 새기기 위해 발신된 시스템의 선물인 것이다.
이 이야기도 포함해서.
그러니까 대량생산된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마라.
그저 소비하고 그리고 버려라.
그것이 내가 당신들에게 선물하는 유일한 말이다.'
-261p~262p
저자가 만든 또 다른 포맷의 [다중인격탐정 사이코]인 [시작품신화]도 들어오길 기대한다. 번역된 문장에 대한 불만도 조금 작용했음을 염두에 두고. 이 시리즈의 세 권 중 최고는 1권 [아마미야 카즈히코의 귀환]이었기에 여기에 리뷰를 단다. 사실 뒤 두 권은 구성적으로 다소 허약한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애정이 그것을 막아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