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불안인가 불만인가. 닭인가 달걀인가.

커다랗고 난폭하던 코끼리를 어렸을 때 봤던 기억이 있다. 페인트칠이 빠진 쇠창살 너머로 유난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던 그 코끼리는 불쌍해보였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코끼리가 뇌 같다고 생각했다. 정신의 구조장치. 객체화된 주체들이 세포 한 조각 한 조각에 들어가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임의로 정해진 의미를 향하게 만들어주는 길.

몸 어딘가에서부터 비롯되었을 불안-불만이 날 잠식하는 것은 갑작스럽고 빠르며 꽤 빈번하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해낸다. 자위, 음악, 달리기, 웃음 등등으로. 불만이 날 사로잡는 것은 동물적인 영역이다. 난폭한 코끼리 같은 내 뇌는 상황에 대한 완전한 동화를 요구하지만 몸은 굼뜨다. 불만이다.

어렸을 적엔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보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 대해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야 난 깨달은 것이다. 애초에 '모든 것'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음을. 그렇다면 내 고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고통은 '허상'인가? 잔인하게 얘기하자면 그렇다. 연민을 갖춰서 얘기하자면 내 코끼리는 창살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창살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왜 날뛰었던 걸까. 창살이라는 보이는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코끼리는 스스로 비명을 질러서 창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창살을 단순히 제한, 껍데기, 착각이란 의미로 국한되어 해석하지 못하게 만든다. 훨씬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것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드는 감옥에 대한 문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불안이 먼저인가 불만이 먼저인가.

 

변질되다, 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의미의 숭고함에 대한 보장을 발화되기 전부터 담보한다. 다른 표현들에 비하여 '변질되다'는 표현은 상황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해석과 자기패러디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그 표현에 혐오를 느낀다면, 약속에 대한 혐오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말은 상대성에 대한 거부와 그를 수행하는 과정으로서의 연결을 지시한다. 그 노골성은 포르노적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원히 변질되는 것인가. 변질 그 자체가 삶인가. 변질이란 표현을 받아들이는 보편성을 재차 주목해보자. 다시, 불안인가 불만인가.

 

보편성은 곧 반응성에 대한 얘기다. 모종의 행위에 대한 상대, 혹은 제삼자의 반응에 대해서 이해하고 답을 가진다는 것은 패턴이라는 이름이 붙은 외부행동작용에 대한 수용의 정도를 가리킨다. 반응에 대하여 완전히 무능력한 인간을 하나 가정해보자. 상대적으로 작동되는 결론들 속에서 거대화된 약속 형태로서의 답을 취할 수밖에 없는 반응성의 영역에서 생각해볼 때, 보편성은 처음부터 붕괴될 여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그 기반의 빈약함은 종종 체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곧잘 기능해왔다(아주 질릴 정도로 말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허상이 불안을 가질려면 허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착각 또한 가져야 한다. 처음과 끝이 같이 오메가와 오메가라면 결국 애초에 없어질 것은 없었던 것이고, 불안 또한 꾸며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붕괴된 것과 붕괴될지도 모를 것을 유지하는 것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일까. 불안과 불만은 어떻게 의식 속에서 동거하게 되는가.

코끼리는 왜 울었던 걸까. '어렸을 적'에 '봤던' '코끼리'라는 감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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