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을 기점으로 지방 상영만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허겁지겁 보고 왔음. 

 

솔직히 신지가 도망치지 말자고 중얼거릴 때 흥분된다기보다는 좀 쪽팔렸다. 그 반추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골백번은 더 들어서 이젠 희화화의 대상이 되버린 대사를 다시 듣게 되자 올라오는 이 뻘쭘함. 그려그려. 에바는 막 오덕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에서의 우리나라에 있어서 오덕 문화의 정점이자 상징과도 같았고 그 붐을 전후로 무지막지하게 재생산된 온갖가지 리믹스들(그 난장판 한가운데엔 창설 이래 최고의 대박 티켓을 잡아쥐게 된 가이낙스의 열정으로 가득한 용돈 벌기도 있었고)로 인해 에바는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탕진해버린 것처럼도 느껴질 정도였다. 어떤 것이든 시시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무차별적인 리믹스들은 되려 원본에의 갈망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바-안노 히데아키-가이낙스 스텝 라인이라는 조합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에바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가질 권위는 양산된 동인혼적인 소품들과 대적될 바가 아니다. 바로 그래서(상업적으로나 내적으로 납득할 만한 지점으로서나) 에바가 다시 시작됐다.


에바의 그리운 초반씬, 아버지를 앞에 두고 왜 타야 하느냐고 소리 지르다가 주섬주섬 결국 에바를 타버리는 신지의 모습에 얼마나 감정이입이 되느냐가 에바를 이해하는 단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란 작자가 신경도 안 쓰다가 수 년만에 아들내미를 불러와선 기계반 생물반으로 된 괴물딱지를 타라고 강요할 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래? 그럼 타지 마.', '헹, 좆까슈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수.' 이러고 돌아가는 성미라면 에바에의 동의는 물 건너 간 거라고 보면 된다. 휙 하고 돌아서지도 못하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양껏 표출하지도 못한 채 징징 짜면서 자신의 너절한 처지와 정신세계 때문에 비관하고 머뭇거리다가 레이 앵벌이 보고 나서 일말의 마인드 자위질로 자기최면 건 다음 결국 에바를 타게 되는 자기억압적인 신지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파더 컴플렉스, 혹은 다양한 종류의 권위에의 무기력한 굴종에 대한 깊은 일치를 성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문득 서쪽 나라 사람들이 에바를 받아들임에 있어 레이와 아스카라는 투디 미소녀 궁극의 디자인에 대한 헉헉거림과 초호기 헉헉 외에 신지에 대해선 어떤 반응이 주류였는지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난 마침 대니얼 클로즈의 [고스트월드]를 다 읽은 참이었고, 아마 이것이 그 익숙한 초반부를 십여 년만에 보는 내게 어색함을 느끼게 만들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서]는 꽤 명민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극장에서 접하게 되는 셀-리미티드 애니적인 투박함이 CG가 활용된 박력 넘치는 액션신과 은근하게 충돌하는 이 애니메이션은 에바를 처음 접하는 이와 옛팬들을 동시에 먹어버리겠다는 의도로 펄펄 살아있다. 그러니까 물론 이것은 에바를 다시 접한 이로서의 판단이지만, [에반게리온:서]는 디테일의 애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다 더 보여줌으로써 보다 더 완고해진 세계를 구축한 작품이다. 기술력의 발달은 애니 속에서의 비생물들, 소위 대파괴 이후의 도시적 양상들에 대한 정교한 구축과 플롯 기능요소로서의 엑스트라들을 보여주는 것에 열중한다. 그 흐름으로 우리가 파악하게 되는 것은 일련의 '과정'이다. 에바가 기동하고 그를 서포트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아가는 살아있는 도시가 있다. 압축된 시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축소된 것은 그 모든 인물들이 마땅히 가지고 있을 마음에 대한 주의 깊은 확대경이었지만 그를 희생해서 얻은 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신지의 동기부여에 대한 굵직한 부분이다. 동시에 이것은 티비판과는 달라진 신지의 성격적인 차이와 연계되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너무나 많은 정보량을 짧은 시간에 전달하느라 휙휙 넘어가는 컷들에서 침착한 흐름을 기대 못하기에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아무래도 이 부분은 옛 팬들의 눈썰미에 기대는 바가 있다. 거대한 금속 덩어리들 사이에 선 인물이 불러오는 소외감 섞인 정적과 압도감, 그리고 과포화 상태의 이미지 정보는 원작에도 존재하는 것. 이번 극장판은 앞서 얘기한 '과정'의 디테일화와 더불어 전자가 보다 증폭된 인상이다.


모든 것은 야시마 작전을 향해 달려간다. 야시마 작전 에피소드는 원작의 전체 스토리상에서도 모종의 화해와 일말의 결론을 담보한다(사실 티비판에서 이후에도 별 변화되지 않는-되려 심화되는-신지의 캐릭터로 인해 캐릭터의 구제불능적 속성을 제시하는 덴 성공했지만 후속 스토리로 이어지는 마땅한 흐름과 일치되지 않는 어정쩡함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에피소드였기에 이 부분을 시작 파트의 끝으로 잡아놓은 것은 현명했다).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서의 긴장감과 갈등을 높이기 위해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신지가 에바 안에서 겪는 고통은 비주얼적으로 강력하게 업그레이드가 됐다. 티비판에서 이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육체적 통증이 다양하게 강조됐던 정신분열증적 고통에 비추어 영 심심하게 여겨졌던 이라면 이번 리뉴얼판에선 확실한 마조히즘적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의 제작진 또한 마찬가지 마인드였을 것이며 그 결과가 빚어낸 증거는 만족스럽게 잘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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