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갑작스럽게 김연아가 생각난 것은 아니었다. 브랜드 파워 1위, 역대 최고 점수 등등 차례로 세워지는 간판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표정이 견지하고 있는 선천적 무감함이 그녀의 냉정한 아우라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그리고 수많은 승냥이들이 나이값을 못하고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 그녀의 기술적 바탕은 (미세한)부분적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충실하게 다져져 있으며 그 표현력에 있어선 나이를 뛰어넘는 발군의 경지에 다다러 있다고 인정하고 있던 나는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주의를 던져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까 이 연상은 빅뱅과 장근석(오, 세상에...)이 슬슬 좋아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의 정치적 꼼수는 아니었던 것이다(그렇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훌륭했다. 이 시대착오인 것처럼 시청자를 속이면서 시작했던 열혈로봇물은 단순한 로봇물 내러티브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간에 대한 지독한 긍정론을 장르 특유의 알레고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렌라간]이 서사적으로 신선했던 것은 기존 로봇물들의 키워드와 매너리즘에 가까운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놀라울 정도의 속도감으로 전개를 밀어부쳤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방송국 사정이라는 경제논리에 의해 이뤄진 바이긴 하지만 그 효과는 강렬했다. 또한 동시에 감동의 코드화 또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 약속된 서사적 스위치들과 해당 효과들은 이미 기존 로봇물에 학습된 이들에겐 익숙했던 흐름인 것이라, 이 부분에서 열혈 로봇물을 접했던 이와 접하지 않았던 이의 괴리감이 드러나기도 했다. 즉슨 후자들의 [그렌라간]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감정의 인과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 비판은 이제는 거의 선택의 영역(소위 쉬운 말로 취향문제라고 불리는)에 들어가버린 것이기 때문에 납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잠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코드적 긍정론에도 불구하고 편당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적 한계 및 스토리의 극단적인 압축성이 빚어낸 어색한 순간이 가끔씩 돌출되어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러나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렌라간]은 주제를 향한 거침없는 진행에 있어서도 빛난다. 항상 세기말을 꿈꾸는 것처럼 모종의 트렌드로 떠도는 인간비관론과 세계멸망에 대한 어두운 매혹들로 가득한 온갖 문화상품들(저패니메이션에도 지치지 않고 적용되는)의 경향과는 정반대로 의지의 긍정적 힘을 설파하는 [그렌라간]은 뻔뻔스러울 정도의 스케일로 이야기를 밀어부치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천착하는 자세 자체가 세계를 마모시키고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1화의 오프닝은 2쿨 26화 전체에 걸친 긴 낚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함과 동시에 마지막에 보여지는 의미의 역전으로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인간 긍정론에 힘을 보태준다. 그 대책없게까지 보이는 낙관론은 너무도 당당해서 날선 회의주의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고 깔 수 있는 소재를 마련해주겠지만, 혹여나 있을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그렌라간]이 [프리크리] 이후 자신들의 3기 색깔을 정립시킨 가이낙스 특유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장르 전통적인 쾌감으로 가득 차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흑의 계약자]는 다소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전체적으로는 시간낭비에 가까운 작품이었다(그 멋진 작화 퀄리티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충분히 진중하게 풀어갈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이 2부 한시간 분량으로 압축되는 동안 손실이 너무 컸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도 빛나는(혹은 검은색보다 어두워서 돋보이는) 부분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그 순간을 기다리기까진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사로드와 산토르의 결합에 물린 소닉스의 아니마는 영 맛을 못 보여줬다. 그러나 자비앙은 놀라울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해줬으며 엠프리스는 그와 동등, 혹은 그를 넘어서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엠프리스의 힘에도 불구하고 예상외였던 자비앙의 멋드러진 탁월함이 역시 기억에 남는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로시니였다. 변변찮은 지식으로 몇 편의 오페라를 만든 작곡가로만 기억하던 로시니의 실내악곡들이 담긴 이 앨범이 무심하게 집어져 메리디안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 몸에 담고 있던 노래를 빚어내기 시작했을 때, 소리가 빛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 놀라운 순간은 정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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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12-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만원을 돌파합시다.

hallonin 2007-12-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천원부터 돌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