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결에 보게 된 영환데,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딱, 저 의외로 괜찮았다는 정도면 적절한 평가가 될 수 있을 듯. 말하자면 '어느 연쇄살인자의 초상'인 셈인데 거기에 [우아한 세계]가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경제구조적인 측면에서 대한민국이란 척박한 땅에 사는 중산층 중년남자의 보편적 고통을 담아낸 [우아한 세계]가 보여준 세심함에 비하면 이 영화는 경제적 지리적 고민이 없는 미국의 부르주아 가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구조적이라기보단 우생학적인 차원에서의 보다 단순해진 갈등을 보여주고 있지만요.

 

전 케빈 코스트너란 배우 별로 좋아하진 않는 편이었는데 그 이유엔 겉멋들린 듯한 신사적 이미지가 꽤 작용했습니다만, 여기선 되려 그런 아우라를 십분 이용해서 분열증적인 자선사업가 겸 연쇄살인자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냅니다. 그가 연기한 얼 브룩스라는 인물은 살인마인 얼터에고와 공존하는데 그게 깔끔하게 구분되는 유리감이라기보다는 자글자글거리는 믹스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무리없이 소화해내고 있더군요. 그 문제의 얼터에고인 마샬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 역시 훌륭했습니다. 여기서 윌리엄 허트는 가끔씩 머리회전을 이 악마에게 맡겨야하는, 자연스럽게 지킬박사역에 일말이나마 편입되버리는 케빈 코스트너의 절제되고 머뭇거리는 연기에 비하면 노골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광기를 보여주는데 시시때때로 튀어나오시는 게 꽤 유쾌합니다. 데미 무어는 조연이긴 한데.... 뭐 역할 자체가 어떤 주도적이고 강렬한 역할은 못 해낼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영화 속에서 남자여자 통틀어서 가장 과격하게 몸뚱이를 굴리게되는 역할임. 그외에 나머지들도 괜찮았음.

 

주의할만한 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마샬일 때는 한 번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중인격자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일반화된 연출로라도 살인의 주체가 마샬이 될 수도 있는데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않고, 살인을 수행하는 것은 한껏 냉정해진, 그러다가도 황홀해하는 얼굴의 얼 브룩스일뿐이죠. 마샬은 옆에서 박수치고 부추기고 구경하고 충고하고.... 딱 그정도 만담가의 역할. 잘못했다간 살인을 저지르는 집중된 광기를 어설프게 흐트러뜨려서 관객에게 심적인 혼란을 줄 수도 있는 이 연출을 무난하게 수행하는 일에는 케빈 코스트너와 윌리엄 허트의 노련한 콤비플레이가 원숙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악마와 그 옆에서 영감을 불어넣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뮤즈죠.

 

감독인 브루스 A. 에반스는 [스탠 바이 미] 각본으로 떴던 게 1986년.... [초보영웅 컵스]로 감독 입봉한 게 1992년인데 그 이후론 [컷스로트 아일랜드]와 [정글투정글]의 원안과 각본을 맡았을 뿐이고(그리고 그중엔 [스탠 바이 미] 빼면 제대로 뜬 게 하나도 없고. 심지어 [컷스로트 아일랜드]라니...), 2007년이 되서야 15년만에 이 영화로 두번째 영화를 찍은 거니 그 자체가 헐리우드의 흑역사인 듯. 오래 묵은 사람 답게 확실히 [미스터 브룩스]는 특별한 기교나 치기 없이 정극으로 밀고가는 둔중한 느낌이 납니다. 물론 저는 그런 부분이 상당히 맘에 들었구요.

 

생각해보면 영화는 전체적으로 스릴러 장르를 확고하게 취하고 있지만, 중반부는 브룩스씨가 겪어야 하는 생활에 대한 균형유지의 드라마에도 상당한 중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게 썩 깊이 있다곤 생각이 들지 않지만 제시되는 것들 중에 쓸데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막판으로 가면서 산재해있던 상황들이 거의 가이리치 영화 보는 것처럼 데굴데굴 굴러와선 합쳐지기 시작.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하죠. 즐기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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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얼굴의 지적인 살인마 "미스터 브룩스"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09-15 22:18 
    미스터 브룩스 포토 감독 브루스 A. 에반스 개봉일 2007,미국 별점 전반적인 리뷰 2007년 9월 15일 본 나의 2,679번째 영화. 오랜만에 케빈 코스트너와 데미 무어가 나오는 영화였다. 전혀 내용을 모르고 무슨 장르인지도 모른채 봤는데 괜찮았던 스릴러물이었던 듯. 주인공 브룩스라는 캐릭터를 보면 아주 냉철한 살인마이면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양면성이라는 점. 여형사 캐릭터도 6천만 달러의 갑부이면서 형사 생활을 한다는 점. 극과 극의 상반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