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인종주의, 군국주의, 마초적 이상들과 숭고함에 대한 충성스러운 감수성으로 뒤범벅된 스파르타는 지금 시대에 있어서나, 심지어 당대에 있어서나 무언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보통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나라였다.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했던 그 허울 좋은 시민국가는 마치 자멸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약한 아이는 죽여버리고 강한 아이만 골라내서 군사엘리트로 만들고 강력한 육체와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수십배에 이르는 노예들을 통제하려 했던, 단순해서 스케일이 컸던 스파르타 사람들은 환상성을 바탕으로 하는 연극도 음악도 몰랐지만 되려 그들 특유의 고착이 더없이 환상적으로 여겨지는 자기모순적인 나라였다. 국가를 지탱해주는 대다수의 노예와 비자유인들을 제압하고 부리기 위해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고도로 발달시킨 그들의 군사질서는 일견 더없이 고압적으로 보임에도 되려 서로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존중과 견제를 통해 긴장감 넘치는 시민사회적 특징을 가질 수 있었던, 날카로운 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구조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이 사람들의 생활에는 근본적인 균열점이 있고, 그것이 사회동력을 은밀하게 소진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택지가 부족하면 대안도 부재하는 법. 힘외에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고지식한 군사전술의 한계와 외교적 실패(이들의 사고를 따르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외교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선택, 그것도 전쟁의 선택 유무 그 이상의 개념이 아녔을지도 모른다), 내부의 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결과로 마치 통 속에 갇힌 미이라처럼 멸망해갔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런 점에서 스파르타 운명에 대한 축소판처럼 보여진다. 전쟁과 싸움으로 지탱되는 것이 삶이라면 그 의미는 살을 에일 것 같은 날카로운 죽음의 긴장에 의해서만이 허용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선 그런 스파르타적 아이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다. 고립된 공간에서 지독할 정도로 소수인 아군이 승리도 없는 싸움을 위해 아슬아슬한 명분과 그보다 더 큰 죽음에의 취기를 안고 나아가는 모습은 확신으로 이뤄지는 집단자살극에 가깝다. 그러나 흔치않은 맹목성은 다른 이들도 취하게 만든다. 그것은 어떤 이성의 재단이나 철학의 담화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종교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300]은 스파르타인들이 보여줬던 그 모든 고대성에 대한 노골적인 매혹이다. 죽음에 취해 맛이 가버린 시니컬한 스파르타인들의 근육만큼이나 프랭크 밀러의 애정이 절절하게 닿을만한 일도 그리 많진 않을 것었을 터. 그러니 우선 이 이야기가 특별했던 시대의 특별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우선적으로 감안하고 봐야할 터이다. 무척이나 고전적인 마초적 슬픔을 다루는 테르모필레에서의 5일은 다수의 압도적인 힘에 맞서는 장렬한 소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주체 못할 비장감으로 낭만주의자들을 자극하는 힘을 갖추고 있었고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이상적인 현현으로 회자되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철저하게 소수였으며 결국은 죽어갔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스파르타인들만큼이나 [300]은 정치적으로 현명한 척을 하지 않는다. 다섯 개의 이슈를 모아놓은 80여 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 속에서 프랭크 밀러의 거친 선과 불평 가득한 입은 그 단순했던 사내들에게 완전히 취해버려서는, 그들이 남긴 전설을 우직하게 그려나갈 뿐이다.

그들에 대해 멍청하다든지, 숭고하다든지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재량이다. 그러나 신을 비웃고(실제로는 종교축제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광적인 매혹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으며, 이 또한 그들이 가진 자기모순성의 현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신의 대리인을 비웃으며 영원성을 부정하고 오직 피와 살과 뼈로 자신들을 증명하려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천년을 뛰어넘어 화두로 남았다. 그래서 비판은 가능하되 부정하기는 힘든 것이 바로 현상이라고 하는 것임에 프랭크 밀러는 더없이 충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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