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루이 1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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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저 기호와도 같은 제목 [시구루이]의 뜻은 다음과 같다.

'제목의 [시구루이]는 무사도를 체현했다고 얘기되는 서적 [하가쿠레]의 1절,

武士道は死狂ひなり。一人の殺害を数十人して仕かぬるもの。(무사도란 죽음에 미쳐있음이라. 한사람을 죽이는데 수십명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

에서 유래한다.'

저 문장에서 [시구루이]의 제목이 된 부분이 死狂ひ. 그대로 발음하면 시구루히이지만 시구루이라 읽고, '죽음에 미친'이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에도 칸에이 6년에 스루가성에서 있었던 진검 어전시합은 후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명령에 의해 시합을 주관했던 스루가성 성주이자 바로 쇼군의 동생이었던 도쿠나가 타다나가의 목이 잘리는 파국을 가져왔던 사건이었다. 타다나가는 광인으로 알려졌으며 전해지는 민담이나 야사에선 그의 잔혹한 행동들이 심심찮게 언급되곤 했다. 그러나 정사에는 단 한 줄로만 짤막하게 기재된 스루가성의 어전시합과 성주에게 내려진 할복이라는 기록 속에서 작가 난조 노리오는 상상의 힘을 더해 태평성대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잔혹극을 재창조했다. 그리고 30여 페이지 남짓한 그 이야기는 또다른 작가 야마구치 다카유키에 의해 더 구체화되어 노골적인 폭력의 순간들을 구현해낸다.

이야기의 시작은 스루가성의 어전시합장. 한 광인이 열어제낀 광기서린 축제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열린 평화 속에서 그들이 숨겨왔던 야수성과 그에 충실히 따르는 거침없는 폭력을 통해 악마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시합에 참여하는 무사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목도가 아닌 진검. 그리고 그 첫시합에서 우리는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발달된 등근육을 가진 외팔이 검객과 귀기 어린 맹인 검객의 대치를 보게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길게, 그 둘의 과거를 향해 되돌아간다. 그것은 시대가 서있던 자리 아래에 무엇이 깔려있는지를 되묻는 것과도 같다. 기이한 운명과 곡해, 그리고 광인들로 이뤄진 그 무사들의 길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영광된 무사도의 길이란 없다. 수십명을 감당해내는 무사도의 정신을 통해 봉건주의적 환상을 뒷받침하는 저 [하가쿠레]의 1절에서 [시구루이]가 충실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미쳐있음'이다. 봉건주의의 기반을 받치는 무사란 아주 간단하게 정의된다. '소수의 사디스트 아래에 선 마조히스트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찢기고 부서지며 서로를 죽인다. 상하관계에 의한 명령에 의해서, 억압된 욕망이 피어나고 증오가 샘솟게된다. 그 견고한 틀을 헝클어뜨리려는 이는 철저하게 망가지고 배제된다. 그리고 또다른 곳에 욕망과 증오가 독버섯처럼 자리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군신간의 충절이라는 허울을 지탱시켜주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과 폭력의 쾌감이다. 애초에 어전시합 자체가 주군의 광기에 의해 치러지는 것이며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상대를 향한 집착에서 비롯된 묵은 복수심의 교차뿐. 그렇기 때문에 더없이 지독한 [시구루이]의 표현과 오락성에의 충실함은 결과적으로는 무사도의 환상에 대한 비웃음과 고어적 쾌감에 대한 작가적 집착이라는 두가지 포지션을 가지게 된다.

독자는 1권의 컬러페이지 첫 장을 본 순간, 여기서는 무엇이든 다 보여질 수 있다는 걸 깨닫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특징을 잔혹에서 찾는다는 원작자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시구루이]는 말그대로 지독하게 마초적이며 지독하게 잔혹하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운 속에서 칼이 허공에 휘둘러지고 공포, 긴장, 불안에 휩싸인 인물들의 표정과 먼저 베기 위해서든 피하기 위해서든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의 클로즈업은 사지절단의 결과를 기다리기 직전에 미리 겪어야 하는 스펙터클들이다.

[시구루이]가 그 모든 잔혹들에 대한 노골적인 매혹임을 부정하긴 힘들다. 작가의 집요한 연출 속에 배치된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 휘둘러지는 칼과 베이는 순간, 그리고 뒤이어 튀어나오는 피와 뼈, 장기의 세례를 비추는 과정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다. 그러면서도 [시구루이]는 복수극이라는 원초적인 플롯의 힘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핏물 고인 이야기는 그 선정성과 거침없음으로 인해 이 장르의 독자들을 완벽하게 흥분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구루이]가 오락물로서 최고의 쾌감을 전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비위 약한 독자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모쪼록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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