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5. 보이더 디르 픽 메르타니(2)
“어이, 어이, 일어나. 언제까지고 자고 있을래.”
(응답 없음)
“어이, 소설 진행하는 건 너잖아. 빨리 일어나.”
........ 좀만 더 잘래.
“어이, 얘야?? 어이, 어이?”
(응답 없음)
“할 수 없지. 어이!!”
..그 작은 몸집에서 나온 거라고 상상할 수 없는 묵직한 목소리가 기숙동 604호실에 퍼졌다. 왁! 뭐야, 여긴 지옥인가? 나 죽은 건가?
“아니야.”
보이는 것은 아까 본 처녀귀신이,어었다. 난 깜짝 놀라 기숙사를 나가 문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는데. 음, 나 귀신 아니거든?”
문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기숙사 밖에서도 보이는 새하얗고 긴 머리카락. 생긴 건 처녀귀신 맞잖아! 조금 작은 것 같지만.
“놀라게 해서 미안. 나는 보이더 디르 픽 메르타니. 카르텔 성에서 왔다.”
무서웠지만,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일단 문을 열고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동그란 의자에 몸을 숨기고 그녀의 얼굴을 살짝 엿보았다.
“뭐야, 그래서.. 왜, 왜 왔는데..요. 처녀귀신.. 어서 가..요. 워이, 워이.”
“처녀 귀신..이 아냐!”
그녀는 말했다.
“그렇지만, 머리 길이도 길고 옷도 길잖아..요. 누가 봐도 처녀..귀신인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뭐, 이번은 내가 넘어가기로 할까. 나 처녀귀신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마.”
싱긋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 한숨을 놓은 기분이었다. 아, 정말 귀신이 아니구나. 그렇지만 지금도 조금은 두려웠다. 얘가 날 나중에 어떻게 할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일단은 그녀의 말을 믿는 셈치고 들어보자.
“뭐, 뭐에요. 그래서 왜 나..나에게 온 거에요?”
“너에게 하나 부탁할 게 있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날 외계 세계로 납치하는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네 안경에 조금만 살아도 되겠니?”
네? 안.. 안경이라굽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경에 사람이 들어가 산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외계인이라면 아마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녀는 겁먹은 나를 쳐다보고 이어서 말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냐.”
“.......”
“비상식량 같은 것은 이미 워먼덱스 안에 충분히 구비해 놓았다. 네가 나를 위해 음식을 구해다 주지 않아도 돼. 침실도 워먼덱스 안에 있으니까 안심하도록. 네가 해 줄 것은 날 네가 가지고 있는 안경에 살게 해 주는 거랑, 계약뿐이야.”
“계.. 계약?”
“그래.”
“그, 그게 뭔데요?”
“우리 이성인(異星人)들은 다른 행성에 이민을 갔을 때 그 별 원주민의 생명 에너지를 받아야만 행성에 맞는 몸을 만들 수 있어. 각 행성마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필수 요소들이 다르니까. 그 생명에너지를 받는 과정을 ‘공생’이라 해. 그리고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 공생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계약이야.”
.....공생이다 계약이다, 못 알아먹겠네. 근데 잠깐만. 생명 에너지라고?
몸서리가 쳐졌다. 갑자기 나쁜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들이 생각났다. 분명 주인공이 피를 빨려 외계인에게 몸을 빼앗기기도 하고 외계인이 한 나라를 침공해서 초전 박살로 만드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너무나 무서워서 몸이 얼어버렸다.
“호... 혹시,”
“뭐가?”
“아, 아니. 영, 영화에서 본 저.. 적이 있거든요.. 나.. 나쁜 외계인들이.. 우리 별... 마.. 막 뿌시고 다..니는 여.. 영화.”
그녀는 한번 호탕하게 웃은 다음에 설명을 계속했다.
“아~니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생명 에너지는 그 계약자의 곁에 있기만 해도 내 몸속에 들어오는 거니까.”
‘아..’
일단 안심. 근데 아직도 몸이 떨리네. 정말로 이게 나한테 일어난 일이지? 다른 누군가의 환상도 아니지? 그럼 난 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칠판에 파란 분필이 둥둥 떠다녔다. 이것은 나만이 보는 환각,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 칠판에 파란 분필로 타다닥, 누군가의 말이 적혔다.
‘부탁으로 한 외계인이 너와 같이 계약하자고 말을 걸어왔어. 그럼 생각해보자. 우선 넌 아직 학생이고 할 일이 많잖아. 앞으로 얘랑 계약을 맺으면 네 생각을 벗어날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데, 그냥 무턱대고 계약을 하는 것은 이 외계인도 너도 불이익을 당할 것 같단 말이야. 그와 별개로 아직도 넌 얘가 두렵기만 하고, 설사 허락을 하더라도 네가 잘 숨겨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나뿐만이 아니라 저 외계인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 돼!!’
이번에는 빨간 분필로 누군가의 말이 적혔다.
‘얘한테는 너밖에 의지할 길이 하나도 없잖아. 네가 안하면 누가 이 수상한 외계인을 돌봐주지? 응? 너에게 도움을 청하러온 사람이라면 도와줘야지. 너도 잘 알잖아. 이때 제일 외로운 거.’
‘그렇지만 선우는 학생이라고? 아직 할 일이 남았단 말이야!’
‘그렇게 모른 척 하면 저 외계인은 어쩌려고? 저 사람은 또 헤매야 되잖아! 그리고, 저 사람이 또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걸?’
탭댄스.. 아니, 분필댄스 이중주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이 다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지금 걱정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렇다고 하지만 정말 선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될 수가 있다고!’
이런, 일 났네. 나는 마음속 전쟁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빨리 대답을 할 수가 없잖아. 둘 다 맞는 것 같아서 더 혼란스러워!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칠판 속 말이 실몽당이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때, 칠판에 흰색 분필로 쓴 글이 나타났다.
“그럼 나를 시험해 보는 건 어때?”
“시, 시험?”
“응. 시험.”
“그 말은..”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나를 며칠 동안 안경에 넣어 다니며 지켜보는 거지. 네가 날 맡을 수 있는 지 없는 지 확인하는 거야. 결정은 그 뒤에 내려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흠, 며칠 사이라면 저 외계인이 어떻게 지내는 지 알 수도 있겠지.’
‘응. 나도 그 정도라면 딱 적당하다고 생각해. 저 외계인 머리 좀 썼는걸.’
이제야 내 머릿속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아, 알았어요. 여, 여기서 조금 있어도 돼요.”
순간 내 앞에 서 있던 외계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 그렇지만, 그 안에서 한 번이라도 시끄럽게 굴면 가, 가라고 할 거니까요!”
“그래. 최선을 다할게. 예쁘게 봐줘!”
“그럼, 들어가 보세요. 빨리. 나중에 치, 친구 올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안경은 다시 투명한 제 빛을 찾았다. 세상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그 안경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내가 외계인을 만난 것이 맞는 건지, 정말 내가 그 외계인하고 말을 여러 번 섞은 것인지. 온 몸이 아까보다 더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작은 몸부터 시작해, 그 머리칼, 그 눈동자, 그 턱선과 쇄골, 드레스로 다 가릴 수가 없었던 그 몸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예뻤던 그녀. 혹시 오늘은 공부하지마라고 하늘이 미리 정했던 날이던가. 이런 그녀를 만난 날은 당연히 공부 자체를 못하게 되는 게 분명하다.
안경을 쓰고 또 멍하니 있다가 엠피쓰리에 연결된 이어폰을 꽂았다. 의자에 앉아 엠피쓰리의 음악만 흘리다가, 그냥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외계인은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새벽 4시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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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조금 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