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6. 이슬비(1)

 

  

 신 새벽이 밝은 다음날, 아침 다섯 시 기상, 학교엔 여섯시 도착.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 일을 겪고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것은 침대에 누워 자는 척 하면서 놀란 가슴을 억누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겨우 잠이 들어도 어둠속에 비치는 그 녀석의 눈망울흡사 분홍색 은하수를 뿌려놓은 것 같은, 너무나 아름다운 눈망울과 함께 완벽했던 그녀석의 몸매와 그녀석의 몸매를 감추기는커녕 다 드러내고 있던 검은 드래스가 차례차례로 내 눈을 공격했다. 아 정말,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녀석 때문에 열여덟 인생, 유일한 피난처였던 오빠라는 인간의 꿈을 못 꾸게 되었고 어제 공부를 많이 못한 것도 다 그 녀석 때문이다.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거다.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녀석을 계속 싫어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난 어제 하지 않았던, 아니 하지 못했던 숙제를 시작했다. 숙제는 단어 시험 오답노트. 양이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났지만 샤프를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는 맛은 있었다. 샤프를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신기하게도 내 마음도 천천히 비워져 갔다. 이게 단순 노동의 힘인가, 숙제를 내준 선생님에게 마음속으로 땡큐를 외쳤다.

 그렇게 샤프를 휘두르며 숙제를 다 끝내갈 때쯤 내 시야에 빨간 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리본은 내 옆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슬비였다.

 

 천연파마에 빨간 리본이 인상적인 슬비는 숙제를 하고 있는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지 자꾸 내 쪽으로 다가왔다가 멈칫,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운 것이었지. 아마 저 돌린 고개의 양 볼엔 홍매색의 해당화가 예쁘게 피어있을 거다. 저 해당화를 놀려줘야지. 고개 돌린 슬비의 어깨에 손을 턱하고 올리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말하는 투가 내가 봐도 영구였다.

 “무슨 고민이 있는가, 동지여.”

 “!”

 

 슬비는 날 바라보고는 얼어버렸다. 그리고는 말을 뱉었다. 워아아아, 무어야야아. 생각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해당화는 없었다. 어디 간 걸까?

 “니 내 처음보나?”

 난 슬비를 쪼아보았다. 심술궂게 쪼아보는 날 보고 슬비도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아나, 놀라게 하지 좀 마. 볼을 부풀린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역시 좀 놀래키는 맛이 있는 친구다. 고마워, 덕분에 기분이 좀 좋아졌어.

 “그러려고 했지. 안 그러면 뭐하러하냐?”

 “그럼 처음부터 그러지 그러냐? 이러기가 있어?”

 “, 니가 생각해봐. 그런다고 재미가 있을 것 같냐? 당연히 없지!!”

 슬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그러나 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봐. 너 고민 있잖아.”

 “.... 너 그렇게 말하니까 더 얄미워 보여.”

 슬비가 날 째려보며 말했다.

 

 “, 뭐든지 좋으니까 말해보라니까!”

 “.... 그래도..”

 “? 말해보라니까?”

 “...... 아..”

 "말해봐봐. 응?"

 

 "..."

 슬비는 나에게 화내려다 그만 두고 쓴 웃음만을 나에게 보였다. 끈질겨, 장난도 정도껏 해라고 내게 말하는 웃음 같았다. 

 

 “에이, 됐다. 좀 그러네.”

 “......아이, 궁금해지게 왜 그러냐?”

 “됐고, 수업준비나 하셔. 나 화장실 갔다가 올게.”

 슬비는 교실을 나가 버렸고,

  “........”

 난 슬비가 교실을 나간 후에도 멍하니 슬비가 나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한 바람이 날 붙잡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쯤 있었을까. 새벽어스름도 걷히고 내 몸을 감싸던 바람도 지나갔다. 난 수업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보고 교과서를 챙겼다. 그리고 슬비와는 얼굴 한번 쳐다보지 못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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