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감
박완서 외 지음 / 정민미디어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여러 단편이 실려 있었고, 모두 괜찮았지만, 윤명혜의 <꼬레> 앞에서, 다른 모든 글들은 내 뇌리에서 지워졌다. 그만큼 강렬했고, 그만큼 인상깊었으며, 그만큼 훌륭했다.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그 하나의 실마리를 가지고 '어떻게 루벤스가 이 한국인을 만나게까지 됐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름대로 창작하여 풀어낸 이 중편은, 단지 루벤스와 이 남자 꼬레와의 인연뿐만 아니라, 이 남자 꼬레의 처절한 인생 역정을 지극히 담담하게 그려낸다.
임진왜란이라는 난리통에 모든 것을 잃고 노예선에 팔려온 남자. 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조선에서의 삶을 <전생>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리하여 이탈리아까지 떠나서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게 된 꼬레였지만, 실제로 그의 조선에서의 기억은 항상 몽환적이고 가물가물하고, 그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상태로 이탈리아에서 죽은듯이 살아간다.
생사의 경계, 피해자인 조선 노예뿐만 아니라 그가 저승사자인 줄 알았던 가해자 일본 졸병들들조차 실상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한낱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꼬레의 이탈리아에서의 삶, 그곳에서조차 존재하는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 생명력에 넘치는 그의 아들이 젊은 혈기로 뛰쳐나가는 이야기, 노예들의 운명, 수많은 이야기들을 한데 섞어 회색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이 꼬레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회색이 아니다. 그 결을 하나하나 훑어보면 조금조금씩 다른 이야기, 다른 빛깔, 그 모든 것에 진한 무게를 갖고, 하나의 그림 안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아아, 말발이 딸려서 이 작품 <꼬레>의 감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작품 전면에 흐르는, 이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석양의 태양빛 같은 느낌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생사를 가름하는 그 깊은 무게를 찾기 위해 수없이 고뇌하면서 이 소설을 썼을 작가 윤명혜의 그 깊은 삶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나타내면 좋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