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살어? 말어?
오한숙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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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관련이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의 추천사도 인상적이었다. '남들은 배부른 고민한다고 일축해버리는 중산층 여성들의 고통을 다루어주어 고맙다'고. 사실, 살다보면 사람의 고통이 꼭 생활수준과 연결된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말하자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전신마비 환자보다는 행복한 거니까. 사람이 모두 똑같이 소중하듯이 사람의 고민도 똑같이 무겁다고 나는 믿는다. 구슬치기에서 져서 '죽고 싶다'고 울먹이는 아이는 실제로 그 애 입장에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좋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사실 사소하기 때문에, 따지면 치사해보일까봐 하나하나 묻어두는 것들의 폭발력은 얼마나 위대하던가. '그 사람이 칫솔질하면서 거품 튀기는 걸 80년간 참아낼 수 없다면 결혼하지 말아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구구절절 명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차별'에 관한 부분이었다. '고등어'로 형상화된 일상의 차별에 대한 기억.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목이 메어 눈물이 북받치는 여성들. 왜 그런지 스스로도 확실히 몰라 설명하지 못하고, 남자들은 그런 것 갖고 쪼잔하다고 몰아붙일 때, 이 책에서는 '왜'를 명쾌히 해설한다. 그건 차별이기 때문이라고.

단지 '섭섭하다'라고 말하면 남편도 '나는 뭐 섭섭한 거 없었는줄 알아?'라고 하게 된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남편이 섭섭할 때에는 '나는 이렇게 대접받아야 마땅한 존재인데 대접받지 못했을 때'이다. 아내들은 다르다. '떠받들어지는 건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 이하로 대접받았을 때' 서럽다. 그건 이미 ‘섭섭하다’의 수준을 떠나 구조적 차별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책 말대로 '남편들은 처가 가서 뜨신 밥을 먹지만 여자들은 시댁 가서 찬밥을 먹는다. 대접이 찬밥이니 밥도 찬밥'인 것이다. 나도 명쾌히 '왜 그럴까'를 잘 몰랐던 '섭섭해'의 관계학, 그것을 이번에 이 책을 읽고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해가 된다. 한 아줌마의 이야기를. 국졸인 아줌마가 중졸 남편에게 시집가서 평생을 몸종으로 부려먹혔다. 자신을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시어머니에게 늘 절절매면서 속으로만 앓고 살던 그 아줌마, 그런 그 아줌마에게 어느 날 말다툼수준도 안 되는 그야말로 사소한 말 몇 마디를 가지고 시어머니는 이랬다. '네년이 날 발싸듯 때만큼도 안 여기지!'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 어려운 시어머니를 아줌마가 '발싸듯 때'만큼도 안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왜 그 시어머니는 그런 말을 했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해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시어머니가 그 아줌마를 발싸듯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뜻임을. 밟았으면 얌전히 찍 뻗어야 할 지렁이가 조금 꿈틀거린 것이 '감히 지렁이 주제에!'라는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임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임을. '부처의 눈에는 부처로, 돼지의 눈에는 돼지로' 라는 옛 명언은 정녕코 진실임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 나온 '고등어 아줌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 땐 당신들은 인간이 아니었어.'라고 말한 그 뜻을. 멍청한 남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저 마누라가 그럼 나와 어머니를 개XX로 봤단 말인가'하며 씩씩거렸지만 그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 아줌마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가 있을까'하는 심정으로 두서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그 때 당신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었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남녀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문제들을 실용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단순하고 무식해야 행복할 수 있다>라는 책도 있지만 이 책은 한국인이 써서 더 와 닿기도 하고, 문제를 그야말로 '실용적'인 수준에서 다룬 그 책에 비해 좀더 깊이있는 책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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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10억 만들기 - 10억을 모은 사람들의 돈 버는 기술
김대중 지음 / 원앤원북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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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기대가 컸나보다. 다 읽고난 느낌은 '별로 얻은 게 없다'였으니까. 굳이 꼽자면 '45세까지 10억을 모아야 한다' 라는 제목 문구 그대로의 표어 하나. 이제까지의 재테크 입문서에 비해 '나이'와 '액수'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는 것 하나는 좋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책과의 차별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겠다. (즉, 제목만 잘 지었다-_-;)

재테크의 기초를 제법 닦아놓은 사람들이 다시 이 책을 집어든다면 그것은 제목의 힘이 클 것이다. '10억 만들기'라는 구체적인 문구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것을 모을 수 있는 어떤 좋은 방법이 쓰여있을까 해서 이 책을 집어드는 일이 많을텐데, 정작 내용은 아주 일반적이고 무난해서 그저 추상적 방법론을 훑어보는 수준에 그칠 뿐, 구체적인 방법 제시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얼마전에 읽은 <내집 마련 기술>이 더 나았다)

이 책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일단 가장 유명한 재테크(정확하게는 재테크 마음가짐) 입문서인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만 읽은 사람인 것 같다. 2003년 여름 즉 지금 현재 시점에서 처음으로 이런 책을 고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효용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03년 1월 쯤에 <한국의 부자들>을 읽은 사람, 그리고 그 이전에 <돈 버는 사람은 따로 있다>류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요가 없을 듯. 비슷한 얘기의 반복이고, 생생하게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라면 위에 거론한 책들이 더 나았다. (특히 한국의 부자들)

정리하자면, 이런저런 재테크 입문서를 이미 읽은 사람에게는 별로 필요없는 책이다. 제목의 '10억 만들기'에 혹해서 실제적인 방법론이 적혀있나 싶은 사람이라면 그렇지는 않고 다만 일반론을 다시 짚어주는 책에 가깝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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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마련 기술
최정환 지음 / 아라크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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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택자가 대상인 책이라 제목은 저렇게 썼지만, 원래 주식도 자기돈 10만원이라도 밀어넣고 나야 진짜로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되는 것처럼(정말 그랬다. 모의투자 백날 해봐야 실전엔 안 먹혔다-_-;;), 나 역시 내 돈을 밀어넣어 집을 사고 난 연후에야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이 책에서 말하는 묻지마 투자자, 부화뇌동 투자자였던 것이다.

주식으로 소소히 까먹다가 안되겠다 싶어 전문가에게 맡긴답시고 했던 뮤추얼펀드가 그해 주가지수 1000에서 500으로 급전직하, 피같은 돈 1200만원을 날려먹고 의기소침해있던 내게 엄마가 '그럼 차라리 나머지 돈은 부동산에 묶어놓을래? 최소한 집은 남잖아'라고 하셔서 그냥 엄마말 따라 전세와 융자 안고 덜컥 산 집이 속칭 강남 저밀도 재건축 아파트였고, 매수 타이밍이 좋았던 덕에(2001년 3월) 지금까지 수억의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그 때 나와 모은돈이 비슷했고 주식에 능력이 있어 제법 돈을 따던 친구는 그대로 주식을 고집, 지금까지 손해는 안 봤으되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그 때 주식에서 피를 본 것이 새옹지마였던 셈이지만, 사실 무식이 용감이라고 나의 성공은 오로지 운이었다. 실은 엄마도 주워들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뒷발에 쥐잡기라도 집이 생기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달부터 오르기 시작하자 흥미를 가진 나는 경제신문을 보기 시작했고 부동산 섹션을 관심있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조금만 더 안목이 있었다면 같은 돈으로 '재건축의 왕중왕' 도곡주공을 살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대지지분이니 용적률이니 하는 것도 그때서야 배웠다.

저렇게 무식했는데도 성공했으니 나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번은 요행이 따라줬지만 그 다음에도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고, 오히려 한번 성공으로 자만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부동산 책들을 조금씩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본격적으로 공부하는 수준은 아니다. 이미 집은 마련했고 더 투자할 돈도 없다보니 큰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달까. 그래서 부동산에 발가락을 담근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별처럼 무수한 초보 투자자일 뿐이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딱 적당했다. 적당히 관심있고 적당히 주워들은 건 있지만 적당히 지식이 없는 수준의 부동산 독자에게 매우 흥미있게 읽히는 책이었다는 뜻이다. 기존의 내 지식과 대충 비교해보면서 수정도 하고 추가도 하고 이건 내가 아는 게 맞았구나 고개도 끄덕여가며 재미있게 단숨에 읽어내렸다. 무주택자건 유주택자건 아직 초입 부근에 머무르는 투자자라면 읽어볼만하다 하겠다.

이 책은 '아파트'라는 만백성의 투자대상을 폭넓게 다루면서도 실전 예를 많이 들고 있어서, 즉 넓으면서도 구체적이어서 좋았다. 다 아는 얘기라도 귀에 잘 들어오게 설명하는 재주도 있다. 특히 자기가 관심있는 동네 이름이 나온다면 더욱 재미있을 듯. (가령 일원본동 아파트 얘기는 나도 가본적이 있어 그 동네가 얼마나 좋은지 알기 때문에 더욱 초롱초롱하게 읽었지만 안 가봐서 상상이 안 되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심히 흘려 읽을지도)

와닿았던 부분은 많았지만 앞부분의 '집 설움 겪어본 사람이 집을 일찍 장만한다'라는 부분은 특히 공감이 갔다. 집 설움을 겪지 않는 사람, 간단히 말해 배부른 사람은 먹이를 찾는 눈이 날카롭기 어렵고, 그러다 배고파지면 당황하게 되지만 배고픈 사람은 미리미리 날카로운 눈으로 먹이를 찾게 된다는 진리는 비단 부동산 시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친구와의 새옹지마를 지켜보며 몸으로 체득한 진리다)

아직 부동산 입문서가 없는 사람이라면 한권 사서 곁에 둘만한 책이다. 각오를 다지기에도 좋고 원리원칙을 실전과 잘 융합해서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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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고양이 쿠로 1
스기사쿠 지음 / 시공사(만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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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또한 발전하기 때문에 '여태껏 본 책 중 최고다'라는 표현을 썼다가 몇달 안 지나 그걸 능가하는 책을 발견하고는 민망해하는 사태가 몇번 있었던지라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재까지의 지식을 토대로 쓰는 것이 '현재의 글'이라면, 나는 현재까지 본 고양이만화 중에 최고라는 표현을 감히 이 책에 붙여주고 싶다.

물론 '어떤' 고양이 만화를 원하느냐에 따라 감상은 달라질 것이다. '이타고올은 고양이의 숲'이나 '왓츠 마이클' 같은 타입의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나와는 좀 거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최고라고 표현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고양이책 스타일에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으면서도 귀엽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스타일이냐-그건 '거의 완전한 고양이 시점의 이야기'이다. 지나치게 의인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인간 관찰적인 시점도 아니고, 고양이의 눈으로 고양이의 내면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의인화가 배제된, 절제되어 조용하되 오히려 더욱 깊은 파문을 일으키는 이야기. 바로 이 '쿠로'라는 고양이의 시점에서 그려진 짤막한 2페이지 연작만화 <묘한 고양이 쿠로>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반(半) 들고양이 쿠로가 태어나서 쭈욱 겪는 고양이 일상의 에피소드 엮음이다. '묘(猫)한 고양이 쿠로'라고 우리말 제목을 붙였는데, 정말 그렇다. 여기 나오는 쿠로는 의인화가 절제된 '진짜 고양이'의 감성에 가깝다. (아주 의인화가 없을 수야 물론 없지만, 같은 반 들고양이들을 다룬 '나비의 일상'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쿠로는 담담하게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한다. 앙숙 오렌지, 고양이를 '자기식'으로 사랑하는 여우여인(어떤 식인지는 만화를 보면 안다;;), 어린 쿠로에게 동경의 대상인 보스 고양이, 그리고 갓태어나 버려져 얼어죽어가는 꼬마,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이 어려운 뚱보소년 메라부, 그런 수많은 사람들과 고양이의 이야기들을 참 간결하고 깔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절대로 인간적인 감정 과잉을 넣지 않은 건조한 대사 스타일이지만 그게 오히려 더 묘(猫)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쿠로는 어디까지나 자기 눈에 비친 '사실'만을 서술하고 있을 따름인데, 그런 쿠로의 어투는 '사실'뒤에 숨어있는 '진실'을 인지할 수 있는 우리들 인간 독자에게 '사실'과 '진실'의 갭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의 감정을 안긴다. 비극은 비극인대로, 좋은 일은 좋은일인대로. 그러고 보면 이런 화법은 '아이의 눈으로 어른의 세계를 볼 때'와 비슷하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 고양이는 어디까지나 고양이인 법. 고양이 쿠로의 세상은 분명 고양이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어울리는 붓 스타일의 그림체도 참 좋았다. 그림이 너무나 귀여운 것이다. 이 작가는 정말로 고양이의 핵심을 잘 알고 있다!! 고양이의 어떤 매력이 인간들을 홀리는지 너무 잘 알고는 간결한 만화체로 그 부분을 과장하고 필요없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에 나오는 고양이 지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까? 그런데 그 지지보다 더 귀엽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왜곡한 것도 아니고, 정말 귀여운 부분만 잘도 잡아 그렸다는 느낌에 마냥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어쩜 이렇게 잘 그렸을까. * *

한마디로, 나는 이 책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고양이 애호가는 말할것도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잔잔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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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 Masca 외전 - 매혹, 그 비할 데 없는 잔혹
김영희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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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처음 접한 게 벌써 몇년 전이냐... 이 만화의 맨 첫편이 윙크 신인 공모전에 당선된 당시였으니 정말 오래도 되었다. 그 때만 해도 판타지의 탈을 쓴 그렇고 그런 할리퀸 만화 하나 나왔구나 싶었다. 그림도 느끼했고. 그러나 2권부터 이 작품의 세계관, 작가의 인간관, 그리고 박력 넘치는 거대한 스케일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나는 이 작품을 다시 보기 시작하였고, 이제 본편 8권과 외전 2권을 앞에 놓고 나는 판단을 수정했다(실은 수정한지 오래다 ^^). 이 작품은 할리퀸이라는 당의정을 씌운 본격 판타지다. 그것도 한국 판타지 만화사에 한 자리를 차지해 마땅한 명작 판타지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작품을 사서 고이 비닐 포장해 모셔두고 보는 열혈 팬이 되었다. ^^

<마스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매력이라면 모든 등장인물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고통과 번뇌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모든 등장인물 하나하나 속에 올올이 새겨져 있다. 그 '인간'으로서의 면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불사체 마왕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무한의 생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자들, 끝없는 권태를 이기지 못하고 폭주와 학살을 태연히 감행하면서도 개별적인 인연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존재, 무한의 힘을 가졌으면서도 그 힘도 감당 못하는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가진 존재, 한마디로 인간의 약점을 고스란히 가진 '불사체일 뿐인 인간'. 그렇기에 가장 매력적인 존재들로 다가오는 마왕족. (특히 하닷사와 라킨은 등장횟수가 더 많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매력적인 조연들이다. ^^)

그 아래에는 인간과 마왕의 중간 존재라고 할만한 마스카족이 있다. 인간 이상의 수명과 아름다움, 마력, 그러면서도 유한 생명체로서 무한 생명체인 마왕을 벨리알이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는, 강한 힘에 경도되어 부나방처럼 파멸해가는 추악한 욕망과, 약자들에게 헌신하는 숭고한 의무를 같이 지닌 모순적인 존재들. 그들 또한 연약한 인간에 다름아니다. 그런 '인간'의 모습들을 남김없이 끌어안은채 작품은 광활한 대지 위에 거대한 판타지를 그려놓는다. 톨킨식의 판타지가 아닌 작가 자신의 오리지널리티가 물씬 풍기는 완벽한 새 대륙에서, 그들만의 마력과 마법 이야기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1만년 이상의 아득한 역사, 심지어 스쳐지나가는 야수족에게조차 그 유래와 설정을 일일이 새겨놓은 작가의 섬세한-그러면서도 거대한 구상에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치밀한 구상은 비단 세계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플롯 면에서도, 나는 1권부터 최근권까지 다시 보면서 대사 하나하나에 숨겨진 수많은 복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이건 이랬고 저건 저랬단 말이지. 그걸 이 작품이 장기 연재될지 안 될지 확신할수도 없는 신인 공모전 시절부터 하나하나 심어놓은 것을 보며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 '매혹 - 그 비길 데 없는 잔혹'은 외전의 형식으로 나와있지만 이걸 안 읽으면 없으면 본편이 이해가 안 가는 까닭에 본편의 독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내용이다. (안 그러면 왜 최근 연재분에 하닷사가 라킨과 손잡고 아사렐라를 죽이네 마네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또한 1권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레아와 6백년전의 대학살 이야기의 전모가 드러난다는 점에서도, 본편의 구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필수 코스라 할 것이다.

특히나 라킨의 부상(浮上)은 개인적으로 정말 기쁜 일이었다. 첫번째 외전에서 작가가 말하길 '순정스럽지 못한 외모로 본편과는 인연이 없는 캐릭터'라고 하여서, 그 시절에도 라킨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나로서는 '앗, 이 짧은 외전에만 나온단 말인가' 하고 아쉬워했었는데, 이번에 두번째 외전에서 주인공격으로 나와준데다가 요샌 본편에서도 한량없이 멋지게 나와주니 실로 즐겁지 아니할 수 없겠다. ^^ 그리고 레아. 예상보다도 훨씬 괜찮은 여성이어서 반가웠다. 2천자 제한에 걸려 내용을 줄여야 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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