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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우표 ㅣ 동심원 7
곽해룡 지음, 김명숙 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6월
평점 :
얼마전 아이와 기차를 타고 지방에 다녀왔다. 비온뒤라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 색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회색구름이 넓게 하늘에 퍼져 있었으며 푸른 나무들과 모내기 전인 논에는 빗물로 가득했고, 아카시아 나무는 하얀 꽃들로 가득했다. 이제 말문이 터진 아이가 창밖을 보면서 "나무 나무" 하길래 내가 "아카시아 나무"라고 말해줬다. 아이는 단숨에 "아까시 나무"라고 말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차타고 간 이야기를 뭐라 하면서 "아까시, 아까시"한다. 그래서 웃었는데 <입술 우표>라는 동시집을 읽다가 아까시나무가 나와서 깜짝 놀랬다. 혹시나 아까시나무가 따로 있나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아카시아 나무였다.
[피리가 된 아까시나무]
벌레를 물고 온 박새가
죽은 아까시나무 줄기 속으로 사라졌다
박새가 사라진 자리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찌르찌르 찌르르
구멍 안에서
피리 소리처럼 맑은
아기 새 울음이 나온다
'턱걸이'와 '달리기', 두 시는 참 건강한 느낌이다. 이를 앙다물고 눈을 감고 볼을 씰룩거리다가 팔을 굽혀 턱걸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과 머리띠를 맨 아이들이 힘껏 달리는 모습을 지구가 들리고, 발바닥으로 힘차게 지구를 돌린다는 표현을 썼다. 운동회날이었는지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다.
[달리기]
머리띠를 맨 아이들이 출발선에 서 있다
화약총을 든 선생님이 하늘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와아! 아이들 함성이 지구를 뒤흔든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지구가 돌아간다!
머리띠를 맨 아이들이 발바닥으로 힘차게 지구를 돌린다
우리 아이는 곧 두돌이 되어간다. 18개월까지 젖을 먹였는데 그 후 밥을 잘 먹다가 다시 젖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저렇게 원하니 어찌 주고 싶지 않으랴 마는 이가 상하게 될까봐, 밥을 적게 먹게 될까봐 젖을 주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다. 아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이쪽 저쪽 젖을 빨아댄다. [해돋이]를 읽다가 엄마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주면서 고요히 서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엄마소처럼 고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해돋이]
송아지가 젖을 빤다
젖꼭지 네 개를
번갈아 가며 빤다
젖꼭지를 문 채
젖퉁이를 킁킁 박아 가며 빤다
엄마 소는 눈만 한 번씩 끔벅이고
먼 산 보고 있다
산꼭대기엔
붉은 해가 솟는다
엄마 소가
붉은 해에게 젖 먹이고 있다
엄마 젖 먹고 붉은 해가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곽해룡 시인은 마음이 참 고운 분인가 보다. 팔뚝에 앉은 잠자리에게 겁도 없이 앉아준 것이 고마워서 숨소리도 죽이고 막대기처럼 서 있는가 하면, 철쭉나무 숲에서 오목눈이 아기 새를 발견하고도 아기 새들이 무사히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친구들에게 뻥쟁이라 불리우는 것을 택한다.
[막대기가 된 날]
연못 구경을 하고 있는데
된장잠자리 한 마리가
난데없이 내 팔뚝에 앉았다
앉으라고 손가락 내밀 때는
달아나기만 하던 잠자리가
겁도 없이
내 팔뚝에 앉아 준 것이 고마워서
나는 잠자리가 날아갈 때까지
숨소리도 죽이고
막대기처럼 서 있었다
시인의 눈길은 또 소외된 자들에게 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면발 뽑은 연변 아저씨에게, 뇌성마비에 걸린 막내 고모에게, 빈 병 모으던 할아버지에게, 맹인 가수에게, 짐차 운전수인 아빠에게.... 하지만 '희망'이란 단어를 꼭 품고 있는 듯 하다.
[입술 우표]
짐차 운전수인 아빠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부산도 가고
여수도 갑니다
떠날 때마다 아빠는
내 앞에 뺨을 내밀고
우표를 붙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입술 우표를
쪽! 소리가 나도록 붙여 드립니다
어느 날은 아빠가
부산으로도 여수로도 떠나지 못하고
반송되어 와
종일 술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잠든 새벽에 떠나느라
내 입술 우표를 받지 못해서 그렇다며
이제 아빠는
내가 잠들기 전에
미리 입술 우표를 붙여 달라고 합니다
어떤 날 아빠는 내 입술 우표를
한꺼번에 두 장 세 장씩 받아 가기도 합니다
내 입술 우표는 아무리 붙여 주어도 닳지 않아
아깝지 않지만
두 장 세 장 한꺼번에 붙여 드리는 날은
아빠를 오랫동안 못 볼 것만 같아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