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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탱고 - 파리지앵보다 매혹적인 파리 다이어리
칼라 컬슨 지음, 하윤숙 옮김 / 넥서스BOOKS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무튼 사진의 힘이란! 우스갯소리로 동네에 “파리△△△” 빵집 한 곳 없는, 대신 떡집과 방앗간은 있는, 시골 동네에 살면서 <파리탱고>를 읽는 내내 사뭇 파리지앵이 된 듯한 기분을 즐겼으니, 참 대단하달밖에.
‘낯선 사람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무슨 일을 하세요?”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리지앵의 도도함처럼 혹은 바게트 빵처럼 딱딱하고 각이 딱 잡힌 양장본 <파리탱고>의 두꺼운 표지를 착 열면, 막 무대를 향해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며 계단을 올라가는 물랭루즈의 화려한 무희의 뒷태가 보인다.
호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사랑에 빠진 후, 심장의 1/4조각은 파리에 있다는 사진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칼리 컬슨이 살짝 와인에 취한듯 찍고 써내려간 <파리탱고>를 물랭루즈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무대처럼 즐기라는 권고이다.
초연 당시 낯 뜨거운 춤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온 무희들의 캉캉춤이 대표적인 댄스클럽 물랭 루즈(붉은 풍차)는 그 길고 긴 역사 동안 전소가 되거나 파산 위기에 몰리는 등 위기를 겪었지만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 조세핀 베이커 등 프랑스가 자랑하는 가수들이 무대를 빛낸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클럽이다. 물랭 루즈는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클럽을 넘어서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처럼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파리지앵이 즐겨 찾은 천국 같은 곳이다. 바게트 빵의 부드러운 속살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물랭 루즈 무희들은 ±2kg가 넘으면 해고일 정도로 엄격하다. 자유로운 듯하지만 완고한 파리지앵의 특성이랄까, 바게트 빵의 겉면이랄까.)
<파리탱고>는 물랭 루즈의 화려한 무대보다 이면의 무희들을 사진에 많이 담았는데, ‘10센티미터 하이힐을 신고 15킬로그램짜리 머리장식’을 머리에 얹은 채로 가슴을 드러내고 춤을 춘다는 정도만 보면 신문 사회면이 떠오를 법하지만 천만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무희들은 ‘천박하기는커녕 우아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예의와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변화와 변혁에 관대한 파리지앵의 사례로 물랭 루즈가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늘 새로운 쇼를 고민하는 기획팀 멤버의 나이가 81세, 79세, 77세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건 열정 때문이지요.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팀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비록 우리는 늙었지만 이 쇼는 결코 늙은 쇼가 아니니까요. 중요한 것은 젊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파리지앵들을 취재한 이 책에 실린 글이 대부분 약간 들뜬 기분에 써내려간 것은 맞지만(읽다 보면 덩달아 붕 떠오른다), 낯선 이들에게 파리가 그리 만만한 곳만은 아니고,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의 종종 파리의 변화에 대한 애잔함이나 아쉬움을 토로하는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낭만적인 생각으로 찾아온 예술가들에게 파리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이고, 런던이나 뉴욕처럼 기업후원금이 후한 곳도 아니다. (커피 한 잔에 4유로, 현재 환율로 대략 6800원 꼴이다.)
그러다보니 파리 외곽의 버려진 건물이 예술 불법 점거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고, 이들은 이른바 ‘문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국가에서 사용 권한을 받아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런 풍토도 바뀌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설치예술가 카를로스 레가소니는 10년 동안 사용했던 철도국 창고를 재개발 목적을 앞세운 파리시청에게 내줘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파리는 여전히 흥겹다.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작가가 바라본 파리의 모습은 순혈주의에 속박당한 파리지앵들의 모습이 아니다. 파리에서 도착한 그날부터 파리 아프리카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한 저자는 몇 블록 지나서는 남미의 탱고와 살사의 매력에 또 흠뻑 빠진다.
전통과 변혁이 절묘하게 맞서면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파리에서 사는 그들은 과연 누굴까? 작가가 물어본 파리지앵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는다. 그중 가장 그럴듯하게 들리는 정의를 옮기자면 이렇다. “벨르빌에만 140개나 되는 인종이 함께 뒤섞여 사는 도시에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층의 이주자가 뒤섞여왔지. 모든 파리지앵의 몸속에는 이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이게 바로 파리야.”
그러니 책 옆에 바게트 빵 대신 떡을 놓고도 얼마든지 파리지앵의 기분에 취한 내 자신이 부끄러울 게 없다는 것이지.***
<밑줄긋기>
어느 비오는 날 퐁피투센터 바깥에 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 든 여자가 리처드 로저스에게 자기 우산 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라고 했다. 리처드는 여자에게 자신이 이 앞에 있는 건물을 지은 건축가라고 소개했다. 여자는 로저스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우산으로 로저스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한다. 161P
“지난 5~6년 사이에 뭐랄까 자긍심 같은 게 생겼어요. 파리지앵에게 딱 어울리는, 사치스러우면서 별난 구석이 있는 것을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가서 퐁피두센터를 한 번 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대체 어떻게 저런 걸 짓도록 허용했을까? 그곳에 갈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내게 묻지요. 저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저런 걸 짓도록 허용했을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건축가가 저렇게 와일드한 건물을 설계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요. 하지만 진짜 광기는 저런 걸 짓도록 허용해 준 사람들 속에 들어 있어요. 이것이 파리지앵만이 갖는 특별함이지요. 그들에게 커다란 비전이 있어요.” 162P
“영감은 우연히 찾아와요. 그러므로 깨어 있는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해요. 향기도, 유리창에 비치는 햇빛도, 겨울 낙엽도 그냥 무심히 봐 넘겨서는 안 돼요. 모든 것 속에는 기회가 숨어 있고 그것을 잘 이용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죠.” (파리 오트쿠튀르 수석재단사 스테판 마에아의 말 중에서) 253P
4년이 흐른 지금 내 심장의 나머지 조각은 파리라는 특별한 세계에 깊이 박혀 있다. 아주 소소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생활 방식 속에 빠져 있다. 3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