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기술 - 심리학자 가브리엘 뤼뱅의 미움과 용서의 올바른 사용법
가브리엘 뤼뱅 지음, 권지현 옮김 / 알마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한겨례21에서는 매년 화두를 정해서 인터뷰 특강을 진행한다. 강연을 풀어서 책으로도 출간하는 꽤 유명한 특강의 올 해 주제가 ‘화’이다. 작년을 돌이켜볼 새도 없이, 초반부터 힘겹고 숨 가쁜 일들이 옥죄고 들어오는 2009년이고 보면, 시의적절한 주제이지 싶다.  

지난 3월 14일, 일명 ‘화이트 데이’ 때 신문 기사를 보면 선물을 하려고 절도를 저지르거나, 선물이 주고받는 와중에 큰 싸움을 벌인 사례가 적지 않게 실렸다. 상술이네 아니네를 따지기 전에 적어도 이날만큼은 평소보다 좀 너그러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도 않은 빛 바랜 기념일이었다. 

이날 일들을 가십 정도라고 넘기기에는 요즘 주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화가 쌓일 대로 쌓인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그 원인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독이 바짝 올라있다. 계절은 부드러운 봄인데 벌겋게 달아오른 세상은 8월처럼 뜨겁다. 

무엇이 우리를 자꾸만 달구는 걸까. 한겨례21에서 진행하는 인터뷰 특강이 보는 관점도 그렇지만 그 정도가 화를 참아 넘길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선 듯하다. 관련하여 요즘 출판, 강연, 언론의 초점은 화를 어떻게 풀 것인가, 다시 말해 화를 '잘' 내는 방법에 맞춰져 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가브리엘 뤼뱅이 쓴 <증오의 기술>은 요즘 세태를 딱 대변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이다. 그래서 ‘당당히 미워하라. 당신의 증오는 정당하다. 부당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마음껏 미워하라’는 책날개에 붙은 문구가 매혹적이다.

<증오의 기술>은 대중을 위한 쉽게 쓴 책이지만 학회보고서를 풀어 쓴 듯한 인상이 짙다. 책에서 다루는 사례가 근친상간의 피해자 등 주로 증오의 대상을 가족 관계(가장 뛰어넘기 힘든)로 한정을 지은 데다, 이들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와 상담을 했던 경우인 까닭이다.

특이한 점은 피해자들이 어느 정도 경제적 혹은 지적 능력을 갖추었거나, 그럴만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사회생활에서 아예 낙오를 하는 경우도 소개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어린 시절 미숙했을 때 입은 엄청난 트라우마에 비해, 아슬아슬하나 비교적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여 성공한 이들이다. 

게다가 특정 사례이긴 하지만, 피해자들의 증오가 정당한 근거를 프로이트가 주창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두다보니, 특정 계층의 적개심을 품은 대상이 분명한 특정 상황을 특정한 근거로 풀어내는 식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의 미덕인 동시에 한계로 짚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09년 한국 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가 사례를 든 피해자들은 감당하지 못할 증오를 아예 기억에서 소거를 하거나, 다른 식으로 포장을 하기도 하지만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해 어려서부터 공부나 사업으로 에너지를 쏟아 부어 어느 정도 성공에 다다랐거나 혹은 가능성이 높은 경우이다. 이는 스트레스를 즐겨라, 혹은 즐겨야 이긴다는 식의 무한경쟁체제인 한국 사회 내의 암묵적 동의와 형식상 유사한 점을 보이는데, 일제와 6.25동란과 군사 정권을 거치는 동안 겪은 트라우마를 경제적 성장을 목을 매달아서 성공을 거둔 한국의 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확실히 겹치는 부분이 보인다.

문제는 그들은 높은 학력과 경제적 성공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이룬 사회적인 성공도 답보 상태이다. (사실 가장 뼈아프게 읽혔던 점이다. 내면의 불안이 인간관계, 즉 사회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킬 조짐을 보이는 지점에서 피해자들은 저자를 만나서 치료를 받았다. 만약 무한 경쟁에 보다 너그러운 한국이었다면 ‘경쟁 기계’인 그들이 여전히 성공에 도취된 상태이지 않았을까.)

자칫 증오를 이겨난 성공사례 수기를 쓸 뻔했던 이들인 만큼(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그 단단하게 쌓아올린 무의식의 벽을 허물고 다시 쌓는 작업이 만만할 리가 없다. ‘증오의 정당화’는 이 지점에서 나온 해결책이다. 아문 듯 보이는 상처를 헤집어서 도려내는 수술은 일정부분 내 살을 같이 도려내야할 용기가 필요하다. '아버지의 아이를 갖고 싶은 욕망이 조지안에게는 비극적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모든 아이가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오이디푸스적 환상의 해석일 뿐이다. 조지아의 불행은 아버지가 근친상간을 통해 ‘현실을 정상적인 환상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환상은 강한 파괴력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정상적으로는 아무런 피해를 유발하지 않는 환상을 끔찍한 현실로 탈바꿈시켰다.' 85P 중에서

한때 화가 났을 때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논지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화가 사그라졌다 한들 그 불씨를 완전히 끄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도리어 끌 수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그리고 태울 부분과 태우지 말아야 할 부분을 경계를 짓는다.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마치 외과의처럼 문제를 접근한다.    

저자는 ‘욕망의 지배를 받는 믿음과 환상이나 망상에는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을 뿐’이라면서도 ‘망상은 현실과 모순되고 환상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를 단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가질 법한 평범한 오이디푸스적 환상’이라는 진단은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건 논리의 정당성을 떠나 피해자가 꺼내길 두려워했던 자신의 욕망을 인정했을 때 치료가 가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증오의 기술’이란 늑대의 이빨처럼 무턱대고 드러내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러우며 높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고난이도 기술이다.

적어도 뒤를 돌아볼 여유 없이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동안, 문제에 대한 접근조차 용납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도리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아울러서 모든 삶의 역역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암묵적으로 강요 또는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가브리엘 뤼뱅의 어렵고 까다로운 치료 사례가 한국 사회와 만나는 교집합에 주목한다면 최소한 마지막 거름막인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축소와 지역사무소 폐지 논란이 왜 문제이고 앞으로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솔직히 그 만한 기술이 있지도 않고, 기술로 인정하지도 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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