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말랑말랑한 등지느러미를 슬쩍 디미니 수면에 ‘틈’이 스윽 부드럽게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 ‘틈’으로 몸 전체를 내밀어서는 안 된다. 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을 찢고 나오면서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는 첫 번째 룰이다. 그렇게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배를 깔고 눕는다.

“나는 물 밖으로 광어를 꺼내어 부엌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얌전하고 묵직했던 광어는 부엌 바닥에서 펄떡거린다.” (소설집 중 <광어>일부분)

밖에서 요동치는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는 한 순간 사그라진다. 수족관 유리창 너머는 아직 ‘남의 일’일 뿐이다. 물론 두렵고 불안하기는 하다. 그러나 수면의 낮은 떨림은 곧 가라앉고 잔잔해지지 않던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불안은 또 다시 무뎌진다. 아늑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수족관은 이내 조용해진다.

마감뉴스를 보고 있다. TV도 전등도 끄고 누우면 방금 전까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건, 사고, 전쟁에서 잘린 팔다리와 매캐한 탄내와 신음소리는 홀연 휘발하고 만다. 그런데 백가흠의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에서는 이 모든 게 현실로 끈적끈적 엉겨 붙는다. 이때의 당혹스러움은 석유란 게 편리하기만한 휘발유, 경유 정도려니 했으나 사실은 냄새만 맡아도 쓰러질 지경인, 독성물질이 가득한 타르덩어리임을 알린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태의 트라우마와 비슷하다.

백가흠의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광어>는 “자신이 회쳐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살을 살짝, 아주 살짝 남겨놓”는 주인공의 능숙한 칼질에 대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상식, 윤리, 도덕 등 우리가 뭐라고 부르던지 간에 질기고 두꺼우리라 믿었던 경계를 사정없이 저민다. 알고 보면 그 경계란 게 나약하고 연약하기가 그지없다.

자칫 칼이 내장을 건드리고 만다. “살짝이지만 그래도 그놈들은 곧 죽는다. 나에게 있어 살짝은 그놈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허나 “무채를 수북이, 깊숙이 쌓아주”면 그만이다. 가두리에서 수족관으로, 이어 도마 위에서 헐떡이는 순간까지 지탱해준 경계가 죽음의 첫째 이유인 두꺼운 속살이라는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킨다. 현실에 거칠게 대입하자면 전쟁, 기아, 종교 대립 등 부조리한 현실을 비켜나게끔 해주리라 믿었던 정치, 언론, 법 등 합리적 이성이 추구한 결과물에 대한 탁월한 조롱으로 읽힌다.

“이곳 춘천 말고는 익숙한 곳이 없”는 횟집 종업원인 남자는 손님의 애를 밴 룸살롱 여급을 위해 자신의 경계를 허문다. 통장을 허물고, 사장 몰래 손님을 협박해 술 외상값을 받아낸다. 술집에 얽매인 몸값을 마련해서 여자를 찾아갔지만 아침에 “여자와 함께 잠이 깼으나” 여자가 돈과 통장을 들고 몰래 도망칠 때까지 남자는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가 떠난 후 남자가 고스란히 휴지통에 버려진 광어회를 우적우적 씹는 장면은 카니발리즘을 연상케 한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을 쏟은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SPIRIT’은 마치 석유에 기반을 둔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처럼 보인다. 이번 사태가 단순히 ‘부주의’ 때문이 아님을 경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설에서 광어를 씹는 마지막 대목이 자꾸만 겹쳐지는 부분이다.

 
<귀뚜라미가 온다>에는 이처럼 경계의 속살 안에 감추어진 무뎌진 신경을 건드리는 찌릿찌릿한 소설이 여덟 편이 더 있다. 찌릿한 이유가 작가가 차용한 피학적 헌신, 가학적 폭행, 강간, 신성모독 등 리비도로 해석되는 광폭성 때문이 아님을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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