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원고>를 리뷰해주세요
-
-
사라진 원고
트래비스 홀랜드 지음, 정병선 옮김 / 난장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누구인가? 나를 규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건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꽃을 꽃이라기 부르기 전에는 꽃이 아니었듯, 타자의 시선에 드러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이다. 그래서 나만의 개별성, 주체성도 타자와의 수많은 시선 교차 속, 팽팽한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심지어 지금 서평을 쓰는 이유 역시도 그렇지만) 타자에게 내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가장 근접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누구나 글을 쓸 때만큼은 ‘나’가 작가이자 최초의 독자다. 그래서 표절이나 모방은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향하는 ‘가장 악질적인 죄악’이다.
오로지 글이 존재의 이유이자 인생의 전부인 작가들의 소설, 시, 비평, 시나리오, 일기를 육필 원고인 채로, 심지어 미완성 상태로 빼앗고 태우는 행위는 단순한 소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소각로에 원고를 던질 때마다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면.
1939년 스탈린 통치 하의 러시아, 루반카 교도서의 공문서 관리인 파벨은 손과 옷에 묻은 검은 재가 흩뿌려진 핏자국이고, 나름 기름 냄새와 콜타르 냄새가 피비린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 일에서 벗어날 수도, 고통을 누구와 공유할 수도 없다. 파벨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에게 원고들이란 그저 사상의 불순물, 걸려내야 할 휴지조각일 따름이다.
소설 <사라진 원고>의 배경인 1939년 독재자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에 이른바 ‘막걸리법’이라고 불렸던 사상의 통제가 극에 달했던 공안정국이었다. 작가들은 사상 검열 최우선 대상으로 책은 압수, 폐간되었다. 작가 자신은 감옥에 갇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족쇄가 채워졌다.
파벨이 관리하는 원고 상자에서 원고가 사라진다. 사라진 원고는 살아난 원고가 된다. 살아난 원고는 숙청의 시대를 통과하는 고통마저도 기억될 가치가 된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소각로에 몰아넣기 시작하면 잘못 호도된 방식으로 재편된 기억은 더 커다란 악몽과 불행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939년 8월, 하루 전날까지 적이었던 독일과 소련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파벨을 비롯해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 조약이 “악마들끼리 맺은 거래”라는 걸 알지만 출근길 나선 거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한산하다. 어제까지의 기억이 개인마다 설치된 자체 검열 소각로에서 폐기처분된 것이다.
정말로 이 암울한 기억들이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을까. 파벨은 좋아하는 작가 이삭 바벨의 미완성 단편 두 편을 집 지하실 벽 뒤에 숨기는 행위로 질문에 대답한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아무도 존재와 가치를 모르는 11쪽 짜리 원고는 언제 숙청될 지 모를 두려움의 근간이지만 파벨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기억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아파트 지하실 벽 속에 숨긴 원고는 파벨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혼돈으로 몰아가는 공간이다.
자신이 지하실에 종종 머문다는 걸 아는 관리인 나탈랴는 고발을 할지 모르는 두려움의 존재이자 동시에 성적 매력을 가진 존재로 부각한다. 이는 역으로 파벨의 수상한 행동을 용인하는 나탈랴에게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이후 섹스를 나누는 관계, 의지처가 되지만 나탈랴에 대한 파벨의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지하실은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Libido)에 의해 작동하는 파벨의 원초적인 심리 상태, 이드(id)에 대한 충실한 은유로 보인다.)
<사라진 원고>는 당시의 독재시대의 사상 검열을 고발하는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우선 읽힌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파시즘 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높은 ‘파시즘 엑스(X)’ 체제라고 진단하는 바, 책이 출간된 2009년 여름의 한국 사회 현상 이면의 묵은 악령이 소설 속에서 겹친다.
이와 더불어 파벨을 비롯해 소설 속 인물들은 오감으로 체득하는 경험, 즉 기억의 억압과 혼동에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개별자로서의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파벨과 작가 바벨의 짧은 만남은 오감을 자극하는 강렬한 기억을 서로에게 남긴다. 바벨은 파벨이 대접한 따끈한 차 한 잔(촉각)에 대한 보답으로 아내가 보내준 향수를 뿌린(후각) 손수건을 건넨다.
이를 장석주의 김훈의 ‘칼의 노래’에 대한 평가를 빗대어 끌어오자면 “감각적 개별자로서 자기동일성을 수립하고 있는 한 인간이 국가공동체, 혹은 권력의 중력이 어떻게 개별자의 의지와 욕망에 삼투하며 억압하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적 내러티브”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지점과 동일 선상에 있다.
파벨은 기차 탈선 사고로 죽은 아내 엘레나의 유해와 유품을 사건이 1년이 지난 후에야 받는다. 하지만 유골함으로 돌아온 아내는 더 이상 기억 속의 사랑스럽고 활달한 그녀가 아니다. 낯설고 생경하면서 동시에 다른 유골함과 다를 바 없는 무의미의 경험으로 남는다. 기억이 유폐되고 조작되는 독재 치하 카오스적인 1년은 엘레나에 대한 기억을 환상, 즉 구원에 가깝게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서 냉혹하다.
뇌종양을 앓는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점점 낯설어 한다. 파벨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내와 어머니는 이제 죽음과 기억 상실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형성하는 ‘제1의 타자’ 들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이런 내처짐은 파벨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자백을 했으니까요.”
“저는 그걸 물은 게 아니고, 그들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를 당신에게 물은 겁니다.”
그 물음은 허공에 부유했다. 시모노프가 고개를 돌렸고, 파벨은 그의 얼굴에서 비통한 번민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들은 죽고 없는데. 그만 묻어둡시다. -362쪽
기억의 불확실성의 시대, 다시 파벨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증명될 것인가?’ 적어도 소설 속에서 숙청의 불안에 위기를 겪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직 돌아오지 아내’와 ‘돌보아야 할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돌아왔고, 어머니는 숙청을 피해 도망치는 이웃을 따라 피신을 했다.
라들로프가 아연질색해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강의 끝났나?”-370쪽
이제 파벨의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제 4과의 총책임자 라들로프 소령 앞에서 작가 고골의 자살에 대한 의견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소설 두 편은 이미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지만 이는 고문을 하면 간단하게 드러날 부분이다. (이 역시 죽음을 예감한 ‘칼의 노래’의 이순신 장군과 겹치는 부분이다.) 아내와 어머니에 더해 친구 세리아의 비밀 숙청, 옥에 갇힌 작가 바벨까지, 이제 파벨의 기억은 ‘나의 타자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나’라는 존재 가능성을 잃은 순간,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의 아픈 과거를 다룬 <사라진 원고>가 역사학을 전공한 미국의 젊은 작가 트래비스 홀랜드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은 좀 의아할 수도 있다. 허나 그 덕분인가, <사라진 원고>는 루반카 교도소 이후 행방이 묘연한 유대계 러시아 작가 이삭 바벨(Isaac Emmanuilovich Babel, 1894~1940)에 대한 오마주, 즉 역사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치열한 물음과 성찰을 이끌어냈다.
소설 밖 실제에서 사라진 원고는 그 존재 자체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사라진 원고’는 암울한 역사 한가운데에서도 굴복당하지 않는 개인의 부단한 성찰, 즉 작가의 애타는 마음이 전이가 되면서 다시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