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길을 잃었을지라도
김경집 지음 / 넥서스BOOKS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지금은 길을 잃었을지라도. 누군들 이 제목에서 자유로운 이가 있을까. 그래서 시선이 먼저 가지만, 허나 역시 같은 이유로 손은 자꾸만 머뭇거린다. ‘길’의 의미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 아니라, 요즘 나무를 봐도 한 그루에 달린 잎사귀마다 단품의 물듦이 제각각이듯 내 안에서도 시시때때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길이 평단하고 한 길로만 죽 뻗은,  내가 가기만하면 되는, 누군가 다져놓은 길이 아니란 걸 눈치를 채서 그렇다.  

장님이 장님을 이끌 수는 없는 법. 과연 누가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내가 걸어온 길과 그가 걸어온 길이 비슷하지도 않은 바에야. 불안해하면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방법 밖에 없다는 정도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아는 지침이다. 

책 뒤표지에 새겨진 ‘인생의 절망에서 길어 올린 한 줄기 희망의 빛!’이라는 홍보문구는 상투적일 뿐더러 따져보면 ‘토익 만점 보장!’ ‘취업 100% 성공하는 법’ 따위보다 더 황당하게만 보인다. 가벼운 에세이집 한 권에서 과연 희망 찾는다? 연휴마다 재방송하는 ‘세계 최고의 특급 액션스타’의 특선영화보다 더 지루하지 않을까, 혹시.  

그래도, 읽었다. 내 앞에 이정표를 세워 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은 아니었지만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식이라도, 그래도 뭔가 일말의 기대 같은 걸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지금 길을 잃었다는 전제까지는 동의할만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어차피 먹지 않을 수 없는 약을 앞두고 주의사항 정도를 한 번 더 힐끔거리는 기분이었다. 낯 뜨거운 홍보 문구에 바로 이어서 저자가 인문학자인 걸 엇비슷한 다른 에세이들과 구분점이라고 내세우고 있으니 ‘한 번 보자’는 심정도 없지 않았다. 

출판 시장 불황 등등 홍보문구를 그렇게 달 수밖에 없는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나, 저자는 오히려 그런 전전긍긍한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라고 차근차근 얘기한다. 소로우의 입을 빌어 남의 북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북소리를 찾을 것을 주문한다. 허나 그 길은 제멋대로 하라는 게 아님을 분명히 얘기한다.  

영성에 바탕을 둔 태도가 큰 위안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가 제시하는 길찾기가 개인적 침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자답게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으로 정치, 종교, 사회 등 늘 조우하는 일상과 직접 부딪히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올바른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촛불집회 등 그의 얘기는 부드러우나 매우 구체적이고 확고하다.  

이처럼 희망의 빛 운운하는 여타 에세이와 다르게 대충 얼버무리거나 교훈조의 얘기가 없다. 해박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풀어놓는 다양한 얘깃거리는 길 운운하지 않아도 그 나름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나처럼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이를 위해 저자가 해주는 얘기가 있다.  

글 결 여기저기 젊은 시절과 달라진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자신을 고백하는데, 이는 ‘이 길이 옳은 길이야’하고 자만했던 과거 자신에 대한 자괴는 아니다. 그때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자 좌우충돌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는 귀결처럼 읽힌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이후에 비슷한 책을 낸다면, 그래서 지금의 겸손과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그만큼 지금의 자신에게 충만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때론 곁눈질도 하면서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은 아닌 것처럼 지금은 행복을 복습하는 시간이고, 치우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 보기이며, 이는 곧 배움, 삶의 즐거운 선물을 찾는 일이다.’  

이 책의 첫 장에 소개된 소제목을 가지고 만든 문장들인데, 이 안에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는 다 나와 있다. 그가 지금은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상깊은 구절>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단호한 생각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며 덮어두고 기다리는 것도 지혜입니다. 26P

행복도 일종의 공부입니다. 매일의 복습과 ‘암기’를 요구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늘 확인하지 않으면 정작 그것이 찾아와도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67P

인생이 허무한 건 짧아서가 아니라 너무 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사제의 강론은 돌아오는 길의 제게 경쾌한 죽비와도 같았습니다. 82P

"조금만 다르게 봐도 현실은 신비롭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마그리트의 따듯한 낙관성이 그를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는 ‘철학적 화가’로 만들었을 겁니다. 79P

“양손에 모두 다 쥐고 있으면 다른 걸 잡을 수 없지요. 저는 한 손에 제 인생을 던진 신념이 있으니 행복합니다. 게다가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빈손이거든요. 이건 다른 걸 쥘 게 아니라 제 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있으니 제일 부자지요.”

“금과 은을 앞에 놓고 하나를 고르라 하면 당연히 금을 집어들지요. 그건 은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금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때문이지요.” 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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