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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ㅣ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평점 :
종교적 후광(後光)을 의미하는 아우라(aura)는 미술작품을 설명할 때 진본만이 가진 유일무이성에서 나오는 독특한 기운을 의미하기도 한다. 허나 복제와 진품의 경계가 의미 없는 사진, 영화가 아니더라도 미술작품, 특히 회화의 경우에도 문화적 ‘체험’을 통해 진품과 복제의 아우라 차이를 과연 제대로 인식하는 게 가능할까.
“기술 복제가 미술 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했다”는 벤야민의 견해에 빗댄 얘기지만 회화의 작품성이랄까, 아우라를 논한다는 게 당최 미술사학자나 전문가들의 역사적, 논리적인 ‘계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은 막연한 ‘불신’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의 미술 감상의 수준이 중고교 시절 얇디얇은 미술 교과서의 소개와 해석을 넘지 못하는 수준이고 보면 더욱 그렇고 나 역시 딱 그 수준이다.
이는 작품성 운운을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호당 얼마’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가치로 환산되어 투기 수단으로 전략한 현실과 문화적 아우라의 집대성이랄 수 있는 유럽의 유명 미술관이 거대한 ‘장물아비 소굴’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루벤스의 ‘성모승천’을 미술관에 찾아가서 코앞에서 본다고 해서 ‘프란다스의 개’의 네로가 흠뻑 빠져 나올 줄 몰랐던 그 아우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 작품에 대한 추억이나 열망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네로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성당에서 달빛을 통해서 본 성화(聖畵)가, 앞뒤로 수천 명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작품 위에 매달린 감시카메라가 내려다보고 있는 박물관에서 봤을 때와 같은 작품(?)일 거라는 생각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실제로 ‘승모승천’은 여전히 앙트워 성당에 있다. 아무튼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미술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기 외에도 만지고, 맡고, 맛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러려면 ‘호당 가격’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투기 목적과는 분명 다른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값싸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복제인 동시에 진품인 사진, 영화, 음악에 대한 애정이 높아짐에 따라 미술작품에 대한 외면이 깊어지는 현실은 당연한 수순이다. 엉뚱하게 비유를 하자면, 영화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수없이 복제되어 떼거리로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들이 주인공 네오보다 더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복제시대의 최첨단 도구인 카메라 셔터, 키보드, 마우스 등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긴 뭔가가 있다. 인간의 3대 욕구인 식욕, 성욕, 배설욕이 몸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행위이듯 도구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붓과 물감과 캔버스, 혹은 돌과 정(釘)을 가지고 만든 미술작품의 매력이 여기에서 나온다. 이는 궁극적으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이듯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보편적인 미의 기준으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무서운 그림>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보기’에 섬뜩한 작품도 소개하지만 대부분 ‘읽기’에 으스스한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제껏 평온한 일상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한 줄로만 알았던 작품의 진짜 속성인 그 무서운 아우라를 전혀 몰랐던 게 사실이다.
이처럼 <무서운 그림>은 우리에게 작품을 보지 말고 읽으라는 주문을 한다. 미술작품의 아우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무서운 그림>이 설명하듯 그 아우라가 당시 사회적 시대상과 화가의 개인적 삶과 강렬하게 조우할 때 솟은 기운이 눈과 손끝에서 발산된다고 한다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아우라의 순도가 높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차이가 이 ‘우연한 만남’에서 갈리는 게 아닐까 싶다.
이는 작가의 사상이 갈수록 완숙해지기 마련인 후반기까지 수작을 그리는 뛰어난 화가가 드물고, 오히려 관성에 젖어 졸작을 남긴다는 현실(월간 사색의 향기 8월호 ‘비밀의 갤러리 - 죽음을 향한 시간, 예술혼을 불태우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서운 그림>은 바로 그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을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배려로 풀어놓은 책이다. ‘무서운’이라는 수식은 단지 그 중 무서운 부분을 취향에 맞게 고른 것일 뿐이다.
일본인 저자가 쓴 이 책은 이따금씩 일본의 사례를 비교해서 드는 등 객관적인 소개보다는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친 부분이 보이고, 소개하는 20편의 회화의 선별 기준 역시 시대적, 미술사적 기준이 아닌 저자의 개인적인 취향을 바탕하고 있으며, 옮긴이의 “저자는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이 뿜어내는 두려움을 다루고 있지만 그러는 중에 무게를 싣는 지점은 그림에 등장하는 …… 그녀들의 존엄이다. …… 한데 저자가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를 다룬 방식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는 지적처럼 작품을 해석하는 잣대에서 일관성의 미흡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무서운 감정이야말로 지극히 주관적인 게 아닌가 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회화들이 정말 무서운가 하는 데에는 독자마다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간 같은 그림을 십 수 년을 봐오면서도 이제야 ‘이 작품에 이런 의도가 있었단 말이야?’ ‘그 영화(소설)에서 본 게(내용, 기법) 이 작품에서 기인했던 거구나’ 하고 읽는 내내 깜짝깜짝 놀랐다. 내 무식함이 들통 나서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미술 특히 회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입문서로 적극 추천할 만하다. 감성으로 먼저 맛보았으니 이제 이성으로 맛 볼 차례이다. (역시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복제불가능한 ‘The One', 네오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나는 어둠을 원했다. 커다란 어둠의 뒤편이나, 방 안 어두운 구석, 아이방에서 숨는 것에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
(중략) 자신은 몸을 숨긴 채 상대를 마음 껏 바라보는 것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사랑을 얻을 자신이 없었던 그는 훔쳐보기를 통해 상대를 손에 넣을 수 밖에 없었다. -p 80- 르동의 키클롭스 중에서
앙투아네트는 다비드의 손에서 굴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만다. 어떻게 하면 마라를 예수로,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치켜세울까를 잘 알고 있고 그런 테크닉에도 뛰어났던 다비드다. 어떻게 하면 예전에 왕비였던 이를 능멸할 수 있었을지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아주 희미한 입술의 비뚤어짐, 아주 살짝 굽은 코, 아주 짦은 선 하나로 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악의가 지닌 무서움이다. -p161- 다비드의 마리 앙투아네트 최우의 초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