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뿌리 둘레로 흙이 좀더 필요했다. 간병인이 채소밭에서 흙을 떠다가 화분에 넣었다. 달팽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며칠 동안 달팽이는 화분 옆으로 살금살금 기어올라 제비꽃 꽃잎 위로 곧바로 올라가기를 되풀이했다. 밭에서 새로 떠온 흙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제비꽃 꽃부리 위에높이 자리 잡은 채 낮잠을 잤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간병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곧바로 그 채소밭에서 떠온 마사토를걷어내고 달팽이가 살던 숲에서 떠온 부식토를 화분에 다시채웠다. 그러자마자 곧 달팽이는 새로 떠온 
부드러운 흙에 우묵한 구덩이를 파고 제비꽃 잎사귀 밑에서 
다시 편안한 잠을 자기 시작했다.
- P33

저녁이 되면 달팽이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게 화분의 가장자리로 이동해서는 자기 앞에 놓인낯선 풍경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치 고성 안에 우뚝 솟은 작은 탑에서 주위를 살피고 있는 제왕처럼 사려 깊은 모습으로 멀리서 울려오는 선율에 맞춰 춤추는 것처럼 더듬이를 이리저리 물결치듯 흔들었다.

달팽이는 내가 잠을 자려고 하면 화분 옆면을 타고 화분받침으로 여유롭게 내려왔다.거기서 내가 가져다놓은 꽃송이들을 발견하고는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 P31

숲에 사는 우리 달팽이의 껍데기는 형태가 아름답고 완벽하지만 색깔은 수수하고 광택이 나지 않는 흙색이었다. 중국 만다린어로 ‘달팽이집을 (와거)라고 쓰고 ‘워지‘ 라고 부르는데 초라한 집이라는 뜻으로 우리 달팽이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다.

달팽이집은 둘둘 말아 올린 침낭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옛날에 배낭 위에 침낭을 매달고 다녔다. 그러나 달팽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야영장비들을 발명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자신의 방랑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수단을 발전시켰다.

기원전 4~3세기경, 아테네의 시인 필레몬은 이렇게 노래했다. 달팽이는 도대체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가.…….. 우연히나쁜 이웃과 마주치면 집 안으로 쏙 숨었다가 달아나지."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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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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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백인 경찰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몸수색을 자주 당했다. 수갑이 채워지는 날도 있었다. 그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며, 흑인들이라면 흔히 경험하는 일이라 회고한다. 소설 <니클의 소년들> 초반에도 주인공 엘우드가 아무런 이유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량 절도범으로 몰려 소년원에 가게 된다. 그는 대학교 입학일을 앞두고 도로에서 차를 얻어 탔을 뿐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초. 프랜치 타운의 투쟁, 버스 승차거부, 프리덤 라이드 등 흑인 인권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엘우드는 권력 투쟁에 참가했던 힐 선생님에게 역사와 문학 수업을 받으며 대학 진학을 꿈꾼다. 하지만 대학입학 전날 엘우드는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에 그는 니클의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은 가출한 소년들, 고아, 의지할 곳 없어 국가의 후견을 받는 아이들의 감화를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구타, 강간, 고문이 행해진 감옥였다.

    

 

친구들의 싸움을 말렸다는 이유로 엘우드는 하이트하우스라는 곳으로 끌려가 채찍으로 고문을 당한다. 죽은 아이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학대가 자행되는 곳. 고통스런 일상에서 엘우드는  할머니가 사주셨던 레코드 판에 담긴 루터 킹목사의 연설을 떠올린다.  ”억압자들을 향해  순수한 사랑을 품어보라, 그러면 이 투쟁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증오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엘우드는 고문자들과 세상을 향해 분노와 증오가 아닌  숭고한 마음을 가진다. 그는 오로지 소년원을 일찍 나간 다음, 대학에서 공부하길 희망했다.

    

 

엘우드는 지역봉사를 같이 나가며 친해진 터너와 탈출을 시도했으나 죽음을 맞게 된다. 터너는 엘우드란 이름으로 뉴욕에서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날, 그는 니클과 묘지에 관한 기사를 접한다.  진실을 마주치기 망설였던 터너는 43년 만에 니클로 향한다. 엘우드가 어린 시절 일했던 리치먼드 호텔의 식당에 간 터너. 예전에는 흑인들이 드나들 수 없었던 곳이었으나  식당 종업원은 그에게 “아무 데나 앉으시면 돼요.”라고 말한다. 엘우드가 40여년 전, 리치먼드 호텔의 식당을 지켜보며 “금지된 장소였지만 언젠가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장소. 엘우드는 "어두운 피부색을 초월해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니클의 소년들>은 한 편의 르포와도 같다. 에필로그를 읽고 책장을 넘기자, “이 책은 허구이며, 등장인물은 모두 나의 상상이다.”라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야 아, 소설였지 했다. 작가는 한쪽에서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나고 다른 쪽에서는 학대를 받고 있는 소년들이 살았던 아이러니한 시대, 1960년대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화이트헤드는 실제 도지어 남학교에서 발생한 죽음과 매장에 관한 조사 보고서와 생존자들이 만든 웹사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썼다. 그는 무거울 것만 같은 소재를  담담한 문장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어둡지 않게 그려냈다.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매일 삶의 여로를 걸을 때 이런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엘우드가 들었던 킹 목사의 연설이 담긴 레코드 판은 우리 곁에서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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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1-31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라디오에서 흑인들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와요 (물론 얼마 전에 마틴 루터 킹 데이였기도 하고, 블랙 라이프 매터도 그렇고 등등). 그때마다 올려주신, ˝나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고 다들(흑인들) 얘기하네요. 이 책 청공님이 별 5개를 주셨으면 읽을까 했는데,, 그래도 읽을까요? ^^;;

청공 2021-02-01 00:06   좋아요 1 | URL
마틴 루터 킹 데이도 있었군요!
제가 별점 주는거에 짠순이일지도 모릅니다 ㅎㅎ
이 책으로 9명이 줌으로 함께 이야기 나눴는데요. 두 분은 별 5개 주셨답니다!
읽어보시길 추천해요. 라로님 별점도 궁금하네요~^^

얄라알라 2021-02-01 0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콤 글래드웰 [타인의 해석] 첫 사례로도 억울하게 교통 경찰에게 갑질 당한 후 극단적 선택한 여성 이야기가 등장해서, 처음엔 실화라 해도 안 믿기더라고요....˝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라로 님의 말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청공 2021-02-01 00:32   좋아요 1 | URL
조지 플로이드 사건도, 아이들 보는 앞에서 총격을 가한 사건도... 백인경찰의 폭력( 법적 책임을 지지않는) 은 끊이질 않네요 ㅠ
타인의 해석에도 안타까운 사례가 실려 있었군요.

2021-02-01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2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2-01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드라 블랜드 사건(The Sandra Bland Case) 이었네요...

2021-02-01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02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큰 아이는 남은 한 손을 들어올려, 얼굴은 기차가 가는 쪽으로,
즉 이바노프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마치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둘은다시 넘어졌다. 이바노프가 자세히 보니, 큰애는 한쪽 발에는 털장화를, 다른 한 쪽에는 덧신을 신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자주 넘어진 것이었다.

이바노프는 눈을 감았다. 기진맥진해서 넘어지는 아이들을 더 이상은 애처로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갑자기 그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내부에 갇혀 평생을 힘겹게 뛰고 있던 심장이 그의 전신을 뜨거움과 전율로 휘감으며 밖으로 튀어나오려는듯했다. 

갑자기 그가 예전에 알던 모든 것이 좀더 정확히, 그리고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전에 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이해관계라는 울타리 속에서 바라봤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타인의 삶이 열린 가슴을 통해 다가왔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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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 아이들,압제자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 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 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 있다. 고통이 덜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나 역시 고통받고 있다.
이것이 내 삶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볼 것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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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 P27

표현 능력이 아무리 늘고, 글재주가 아무리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입센은 셰익스피어가 될 수 없다. 입센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입센에게는 셰익스피어가 창작했던 작품과같은 소재들이 전혀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과 인간의 열정이 
중요하다는 생각, 인생의 깊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신과 인간‘, 자연‘은 위축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현대 예술의 사실주의적 신조로 인하여 평범한 인간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생활의 범상함이 우리들을 엄습해왔기 때문에 우리의 관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실주의 예술 이론이 발전해간 것이다. (크러치)
- P46

비극을 쓰기 위해서는 비극을 느껴야 한다. 비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저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크러치는 그의 저서에서 여러 번 절망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냉혹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그의 영웅적 태도를 보고 감동한다. 그러나 크러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새로운 자극이 올 때 옛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냉혹하다고 보는 것이다. 

분명 자극은 존재 하지만 문필가 그룹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문필가 그룹은 공동체의 삶과 생생한 접촉을 하지 믓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비극과 참된 행복이 전개될 수 있을 만큼의 진지함과 깊이를 지니려면,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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