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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다“라고 답한다.
이 책의 저자 J.D. 밴스은 미국 북동부 공업지대의 백인 노동자 계층 출신이다. 이 지역을 벗어나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다고 하니, 그가 어떻게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는지, 성장과정이 궁금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성공신화를 담고 있지 않다. 저자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이 겪었던 불안과 두려움 슬픔, 불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없을까, 고민해온 서사를 들려준다. 자신이 자라온 오하이오 미들타운 지역에서의 가정 문제를 되짚어 나가며 몰락한 제조업 지역의 환경과 정신적, 물질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끼쳤는지, 자신의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성공한 후 자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신의 성장과정을 들려주며 가난의 복잡한 결을 풀어나간다.
밴스의 조부모는 1940년대 후반, 신흥 공업도시인 오하이오 미들타운으로 이주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적 호황을 누리는 지역이었지만, 제조업이 무너지면서 지역민 대부분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 후 가정 폭력과 약물 중독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총기 관련 범죄 건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밴스의 엄마는 아이를 갖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간호일을 해나가지만 그녀는 약물중독에 빠지고 자살시도를 한다. 또한 가정 폭력으로 기소를 당하기도 한다. 밴스는 9학년까지 다섯 번이나 새로운 아빠를 만난다. 엄마와 새 아빠간의 끊이지 않는 싸움과 잦은 이사로 인해 밴스는 학교 공부에 손을 놓는다. 다행히 10학년이 되던 해, 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된 후부터 밴스는 다시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내게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언제라도 안길 수 있는 다정한 품이 있었다.”
밴스는 한 로펌에서 중요한 인터뷰를 앞두고 엄마가 헤로인에 중독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우리 같은 사람이 과연 변할 수 있는지, 가난을 개인의 탓해야 할까. 자식을 망쳐버린 부모를 비난해야 하나.” 밴스는 약에 절어 살아가는 엄마를 향한 분노를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누그러뜨린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집안의 폭력으로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엄마와 자신이 살아온 지역의 가난과 폭력이 엄마를 피해자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밴스는 이 회고록을 쓰면서 가난과 슬픔에 찌든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현장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세워진 정부의 지원 정책보다 더 시급한건 한 아이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어른이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의 진짜 문제는 “가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와 관련” 되어 있다며, 밴스는 조부모가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이끌어 주지 않았다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인생활보조금으로 손자와 힘들게 살았던 할머니는 언제나 밴스에게 ‘배움의 필요성’을 일깨워 줬다. 자식들을 자기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고자 온 힘을 기울였던 할머니의 의지는 강했다. “절대 가지 앞길만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네가 하로 싶은 일이면 뭐든 할 수 있단다.”
지난 11월, 론 하워드 감독은 이 회고록을 영화화 했다. 미들타운 지역의 가난 문제에 대한 저자의 고민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면, 영화는 할머니, 엄마, 그리고 이웃사람들과의 관계에 깊이를 더한다. 1980년대 미국의 공업지대를 실감나게 재현해 놓은 배경 속, 자식을 사랑했지만 자신은 결코 사랑하지 못했던 엄마 역을 맡은 에이미 아담스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높인다. 변두리에 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힐빌리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보자. 희망의 한 소절이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