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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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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를 읽고

 

저자 : 파울로 코엘료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얻는 위대한 업을 가슴에 새겨본다.

내 삶은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고 있는가?

 

몇 년 전 나의 지인이 나의 상황을 역술인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중환자실에 있지 않느냐고 했단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아마 그의 말대로 나라는 존재는 그때 죽었던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죽음을 겪고도 죽음 전과 같은 삶을 살 수야 없지 않은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것이 이뤄지도록 도움을 준다는 말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납을 녹여 금을 만드는 사람,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내 삶의 쓰레기를 태워 진정한 삶의 방법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깨달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연금술사가 아닐까?

 

한 책에 붙들려서 오랜 시간 새로운 책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단을 하고 그 책을 끝까지 읽어내고 다시 잡은 책이 연금술사였다. 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듯 읽어 내렸다. 가슴에 뜨거운 불을 일으키며 단숨에 책장을 넘겼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불꽃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나 자신을 격려하게 됐다. 점점 더 깨어가고, 점점 더 선명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에 감사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이겨내고 멋진 장년, 노년의 삶을 살아냈다. 그러나 그의 그 불우한 청소년기도 그에겐 자아의 신화를 꾸며주는 한 장의 삽화였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밝혀줬다. 내 삶의 암흑기도 내 신화를 장식하는 삽화가 되었음을 깨달으니 남은 삶에 대한 기대가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누구나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단지 그 줄의 끝에 절망을 놓을 것인지, 희망을 놓을 것인지는 줄을 타는 곡예사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이라는 줄의 끝에 희망을 놓아두기로 결심했다. 내 옆에 있는 보물을 다른 세상에서 목숨을 건 모험 후에 찾게 되는 것도 이겨내고 견뎌내는 것, 이것이 희망이라고 본다. 같은 꿈을 꾸었어도 그 꿈을 향해 떠난 사람은 온 세상을 돌고 나서라도 내 보물을 가질 수 있지만, 꿈을 기억의 한 켠에 묶어두고 평상시의 삶에서 투쟁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보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만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아의 신화지만 그 신화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남았을까? 내 삶의 남은 여정이 얼마일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시끄럽고 호전적인 세상에서 사막의 침묵을 배우며 살려고 한다. 오직 나의 신화를 살아내기 위한 희망의 위대한 업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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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테크 산업 활성화의 열쇠 비트코인이란 무엇인가? - 화폐혁명의 구조와 설계도 분석
김승표 지음 / 앤써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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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테크 산업 활성화의 열쇠 비트코인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 화폐혁명의 구조와 설계도 분석

 


책을 이렇게 편집해도 되는걸까? 책을 읽으며 이 책의 특징은 오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오타와 맞지 않는 문맥이 책의 내용보다 머리에 더 많이 남았다.

 

이 책은 블록체인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과 거래구조 등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중간 중간 이어지는 수학 공식은 난해하기도 했지만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책에서 밝힌 저자의 목표처럼 블록체인이 무엇이며,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의 거래에 대한 기본 개념을 설명하기에는 출분한 책이었다. 여전히 블록체인과 코인을 동일 시 하는 사회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오해를 불식시키기에는 이 책 한 권이 충분하리라 본다.

 

‘1984에서 조지오웰이 언급한 Big Brother는 이미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에 따라 부의 편중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정보 또한 집중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위협도 느끼고, 과거에 대한 향수를 찾곤 한다. 그런 사람들의 Needs를 충족시킬 도구가 블록체인이 아닐까? 물론 새로운 변화는 늘 기득권 계급의 집중공격을 받고 사장되곤 해왔다. 그렇지만 민의가 반영된 변화는 결국 그 결과를 이끌어내 왔다. 인터넷이 처음 발전할 당시에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인터넷의 발전을 이끌었던 TCP가 이제는 정보의 분산기술인 블록체인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내용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다만,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지나치게 전문적인 설명을 지양하겠다던 저자의 의도는 장이 거듭되며 지켜지지는 않았다.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쉽지않은 수학공식에 지면을 많이 활용했고, 실제 거래의 사례를 들어 이해의 폭을 넓히려 했지만, 반복되는 설명을 함으로써 지루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블록체인, 특히 비트코인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변화의 시점을 이해하고 미리 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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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교과서 작품읽기 중1 소설을 읽고

 

엮은이 : 류대성, 신병준, 최은영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늘 즐거움을 준다. 너무 길지 않아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주고, 지루함을 갖게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독서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을 고쳐주는 역할을 단편소설들은 해낸다.

 

이 책은 아이들이 읽고 꽂아둔 책으로, 집의 모든 책을 다 읽어내려는 내 목표를 실천하며 우선적으로 아이들의 책을 읽겠다는 결심에서 잡게 된 책이다. 아이들이 어떤 책에서 재미를 느꼈고, 어떤 책에서 감동을 받았을까 공감하려는 나의 노력 중 하나다. 책 안에는 모두 12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 이현주의 육촌 형’, 오승희의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 오정희의 소음공해’, 김유정의 동백꽃’, 전성태의 소를 줍다’, 성석제의 약발할매’, 정호승의 항아리’, 하근찬의 수난이대’, 황순원의 ’, 윤흥길의 기억속의 들꽃과 권정생의 진구네가 겪었던 그해 여름 이야기이렇게 12편이다. 12편 중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소음공해’, 그리고 진구네가 겪었던 그해 여름 이야기는 현대의 우리 이야기다. 시골에서 평생을 산 노인들이 도시로 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문화적 갈등을 겪는 이야기가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에서 표현되고 있다. 효심과 노인들의 삶의 질이 충돌하는 사건들이 실제 우리 사회에서 연출되고 있음을 알기에 이 소설은 훨씬 가슴 깊이 파고 든다. 결국 할머니는 고향으로 가서 생기를 찾고 삶을 가치있게 살아간다. ‘진구네가 겪었던 그해 여름 이야기는 현대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가 국익과 공익의 이름으로 서민들에게 자행했던 폭력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약하디 약한 밑바다 인생은 미래를 현재와 거래하려고 한다. 결국 그런 결말을 표현하지 않았어도 예측하게 한다. ‘소음공해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선입견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소음의 원인을 알아볼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이미 알고 있는 보편 타당한 정보로 모든 것을 판단하다. 그런데 그 판단이 완전히 빗나갔을 때 찾아오는 당황스러움, 뉘우치는 그 순간이 이미 너무 늦은 때임을 알았을 때의 참담함이 그려져 있다. ‘기억속의 들꽃은 전쟁 그 자체의 폭력성이나 갈등을 보여주지 않고, 그런 환경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내명을 그려내고 있다. 전쟁고아가 가진 재산을 갈취하려는 인간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그 못된 심성을 나내 보여준다. 자식까지 내세워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모슴은 인간의 잔인함을 그려내고 있다. ‘동백꽃은 풋풋한 사랑을 닭싸움을 매개로 해서 표현한다. ‘육촌 형은 얼마 전 드라마에서 들은 명대사 결국은 가족이다라는 말을 떠올려주고, ‘소를 줍다는 가난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했다. ‘은 전쟁도 사람이 지닌 우정, 향수, 추억을 모두 파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짧지만 수십 년 한국인의 삶의 자취를 따라 걷게 해준 책이다. 책에서 세 개의 주제를 정해 분류를 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좀 더 자유로운 사색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각기 다른 작사를 엮인 책에서 만나는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글들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의 단초를 찾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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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대결 - 나르니아 이야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전경자 옮김 / 열린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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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르니아 이야기 최후의 대결을 읽고

 

저자 : C. S. 루이스

 

결론부터 말하면 충격이다. 나르니아의 이야기는 종말을 맞이하고, 모두가 아슬란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종지부를 찍어준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가장 느슨한 듯 했는데 결말을 향하는 부분에서 급속히 빠른 전개를 보여줬다. 죽음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의 연결,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영원한 나르니아의 세계.

 

나르니아의 마지막 왕인 티리안은 소문을 듣는다. 아슬란이 숲에 나타났고, 동물들, , 나르니아인들을 혹독히 다룬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즉시 유니콘과 주엘과 그 숲을 찾아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슬란은 진짜가 아니라 사악한 원숭이 쉬프트의 계략으로 당나귀 퍼즐이 아슬란의 모습을 위장한 사실임을 알아낸다. 퍼즐은 밤마다 사자가죽을 뒤집어 쓰고 동물들 앞에 나타나고, 사악한 원숭이 쉬프트는 마치 아슬란에게서 무슨 지시라도 받는 것처럼 사자가죽을 쓴 퍼즐과 귓속말을 나누고는 혹독한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아낸 티리안 왕은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붙잡히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간절히 아슬란에게 청하자, 환상과 같은 상황을 접하게 되고, 정말 티리안을 구할 질과 유스타스가 나타났다. 그들은 아슬란이 보내서 왔다고 했다. 이렇게 나타난 질과 유스타스는 티리안과 주엘을 구하고 숲속 작은 성에 은신처를 마련하며 나르니아인들을 구한 후 다시 나르니아까지 재건할 생각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퍼즐도 구해 확실한 물증도 마련한 이들에게 하나 둘 아군이 생겼다. 그리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바로 칼로르맨의 신 타쉴란이 마굿간에 자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의견들이 분분해진다. 타쉴란과 아슬란은 하나라는 말이 나오고 그 진위에 대한 파악에 목숨을 거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마굿간 안은 두려움의 공간이 되었다. 전투는 계속 됐고, 티리안의 일행은 밀리고 밀려 그 마굿간으로 던져졌다. 그 안은 새로운 세상이었고 죄인은 타쉴란의 벌을 받고, 의인은 아슬란의 이끌림에 따라 새로운 나르니아를 보고 옛날의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 함께 아슬란의 나라를 향해 떠난다.

 

끝부분에서 아슬란은 질과 유스타스가 철도 사고로 죽은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들은 그림자나라, , 우리 인간 세상에서 죽은 것이며 그것은 의무기간이 끝난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제부터 그들에게는 영원한 행복의 나라가 펼쳐지고 아침이 시작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 부분에서 머리를 세게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끝을 향하는 부분에서 머리에 깊이 새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난쟁이들의 이야기다. 쉬프트의 계략에 속은 동물들과 난쟁이들은 칼로르맨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다 티리안왕의 등장으로 해방을 맛보게 되었는데, 이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들은 나르니아도 칼로르맨도 모두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오직 난쟁이들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들은 칼로르맨 병사들에 의해 마굿간에 던져졌다. 마굿간의 새로운 세상이 그들에게는 어두운 마굿간 그 자체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들에게 설명하고 눈을 밝혀 주려고 했지만 그들은 거부하고 스스로 어둠속에 머무른다.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해줬다. 우리들은 난쟁이들처럼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놓은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편견과 선입견을 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그 모습이 이 난쟁이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했고, 지금까지 이어진 각 편들이 모두 해피엔딩이었는데 전혀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최종 결론이 슬프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삶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결과로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림자 나라라고 하며, 단지 우리의 의무가 수행되어야 하는 시간일 뿐이라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위와 같은 결론은 C. S. 루이스가 받아들인 신앙을 투영시킨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이 헛개비 세상은 우리가 받은 소명과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곳일 뿐이고, 이곳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진정한 세상으로 가는 길이 결정된다고 보면 우리가 겪는 희노애락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C. S. 루이스가 원한 결말도 이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은 진정한 세상으로 가는 여정 뿐임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 생각이 자리 잡는다. 나의 신앙과 합해져서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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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자 - 나르니아연대기시리즈 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전경자 옮김 / 열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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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C.S. 루이스가 지은 나르니아 이야기 시리즈 중 여섯 번째 책이다. 동녘호의 모험에서 카스피안 왕자와 세상의 동쪽 끝으로 모험을 떠났던 유스타스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유스타스와 질은 약간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학교엘 다니며 아이들과도 썩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런 그들이 나르니아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릴리안 왕자를 찾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카스피안 왕이 이이 연로해졌던 것이다. 나르니아는 일반 세상보다 훨씬 빨리 시간이 흘렀기에 유스타스는 여전히 청소년임에도 카스피안은 왕자도 아니고 왕이 되었고, 이미 왕좌에서 물러날 때가 되어 있었다. 그런 카스피안에게 닥친 불행은 왕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카스피안을 돕기 위해서였을까? 신과 같은 존재인 아슬란은 처음 나르니아엘 방문한 질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표징을 찾아서 릴리안 왕자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질과 유스타스는 서로 다투고 헐뜯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과 동행한 나르니아의 마쉬글로인 퍼들글롬은 훌륭한 중재자이고, 예언자이며 후견인이었다. 두 아이를 적절히 조절하며 목표에 집중하도록 이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스스로를 희생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막을 지나고 혹한을 견디기도 하며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서 거인들의 나라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거인들의 축제음식이 될 위기에 빠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지하세계에서 그들은 릴리안 왕자를 구해내고 다시 아슬란을 만나 현실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모험 이전보다 더 나은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리즈를 읽다가 한 번은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왜 이 이야기책이 가톨릭에서 판매가 된 것일까? C.S. 루이스의 종교적 변화가 책의 내용에 반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향한 지향점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슬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닐까? 은의자에서 카스피안은 죽고, 아슬란의 나라에서 부활한다. 다시 살아난 그의 모습은 유스타스가 보고 싶어한 그 항해 때의 젊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상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유스타스가 카스피안을 본 것과 같이 말이다. 아슬란은 우리가 진정 원할 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일 것이다. 은의자에서 아슬란은 표징을 기억하게 시킨다. 그러나 질은 어려움을 겪어서 잊고, 당장의 행복과 안락에 취해서 잊는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잊는 순간은 안락하고 편안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과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 바로 그 보상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의자에서는 바로 이런 우리의 배신을 다루고 있다.

 

은의자의 힘은 왕자조차도 옭아맨다. 이 이야기는 많은 상징을 갖고 있다. 왕자이기에 금의자가 아닌 은의자로도 충분함을 보여주고, 그 지위가 어떤 가치인지를 표시해준다. 이렇게 올가미에 걸려든 왕자는 복수라는 출발점으로 인해 최악의 결과에 빠진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미녀인 마녀에게 홀린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유혹에 사로 잡히는지를 보여준다. 지하세계 난쟁이들은 권력에 굴복한 모습의 상징일 것이다. 권력에 굴복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난쟁이인 것이다.

 

이 책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나르니아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다 읽고 보니 그 표현은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은의자를 부순 릴리안 왕자처럼 단호하게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내 용기를 갉아먹는 것들에서 스스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위험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 생각해본다. 주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미약한 존재를 통해서라도 구원해주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은의자는 이런 지향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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