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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의자 - 나르니아연대기시리즈 6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전경자 옮김 / 열린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C.S. 루이스가 지은 나르니아 이야기 시리즈 중 여섯 번째 책이다. 「동녘호의 모험」에서 카스피안 왕자와 세상의 동쪽 끝으로 모험을 떠났던 유스타스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유스타스와 질은 약간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학교엘 다니며 아이들과도 썩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런 그들이 나르니아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릴리안 왕자를 찾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카스피안 왕이 이이 연로해졌던 것이다. 나르니아는 일반 세상보다 훨씬 빨리 시간이 흘렀기에 유스타스는 여전히 청소년임에도 카스피안은 왕자도 아니고 왕이 되었고, 이미 왕좌에서 물러날 때가 되어 있었다. 그런 카스피안에게 닥친 불행은 왕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카스피안을 돕기 위해서였을까? 신과 같은 존재인 아슬란은 처음 나르니아엘 방문한 질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표징을 찾아서 릴리안 왕자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질과 유스타스는 서로 다투고 헐뜯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들과 동행한 나르니아의 마쉬글로인 퍼들글롬은 훌륭한 중재자이고, 예언자이며 후견인이었다. 두 아이를 적절히 조절하며 목표에 집중하도록 이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스스로를 희생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막을 지나고 혹한을 견디기도 하며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서 거인들의 나라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거인들의 축제음식이 될 위기에 빠지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지하세계에서 그들은 릴리안 왕자를 구해내고 다시 아슬란을 만나 현실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모험 이전보다 더 나은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시리즈를 읽다가 한 번은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왜 이 이야기책이 가톨릭에서 판매가 된 것일까? C.S. 루이스의 종교적 변화가 책의 내용에 반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향한 지향점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슬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닐까? 「은의자」에서 카스피안은 죽고, 아슬란의 나라에서 부활한다. 다시 살아난 그의 모습은 유스타스가 보고 싶어한 그 항해 때의 젊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만날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상대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유스타스가 카스피안을 본 것과 같이 말이다. 아슬란은 우리가 진정 원할 때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일 것이다. 「은의자」에서 아슬란은 표징을 기억하게 시킨다. 그러나 질은 어려움을 겪어서 잊고, 당장의 행복과 안락에 취해서 잊는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잊는 순간은 안락하고 편안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과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 바로 그 보상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의자」에서는 바로 이런 우리의 배신을 다루고 있다.
‘은의자’의 힘은 왕자조차도 옭아맨다. 이 이야기는 많은 상징을 갖고 있다. 왕자이기에 금의자가 아닌 은의자로도 충분함을 보여주고, 그 지위가 어떤 가치인지를 표시해준다. 이렇게 올가미에 걸려든 왕자는 복수라는 출발점으로 인해 최악의 결과에 빠진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미녀인 마녀에게 홀린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유혹에 사로 잡히는지를 보여준다. 지하세계 난쟁이들은 권력에 굴복한 모습의 상징일 것이다. 권력에 굴복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난쟁이인 것이다.
이 책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읽는 나르니아 이야기라고 적혀 있다. 다 읽고 보니 그 표현은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삶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은의자」를 부순 릴리안 왕자처럼 단호하게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내 용기를 갉아먹는 것들에서 스스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위험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 생각해본다. 주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미약한 존재를 통해서라도 구원해주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은의자」는 이런 지향점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