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이름도, 작품도 유명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 캐롤>과 <올리버 트위스트>를 몇 번이나 읽었다. 비록 어린이용 축약본이긴 했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기억에 따르면 두 작품 모두 18세기 영국이 배경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디킨스 본인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민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두 도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혁명 직전 프랑스 국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 동시대 영국 런던의 풍경과 사회 분위기가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재미있다. 정말 매우 재미있다.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기분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고, 귀차니즘의 화신인 나를 리뷰까지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뮤지컬을 보러 다니면서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는데, 이 배우가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초연과 재연에 연달아 시드니 칼튼으로 출연했었다. 공연 장면이 영상으로 남지 않는 뮤지컬의 특성상 그의 예전 출연작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원작이라도 섭렵하고자 처음 고른 책이 이 <두 도시 이야기>였다. 따라서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읽었는데도 마지막에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으니, 역시 고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시대를 초월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소설의 도입부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의 거리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디킨스가 워낙 묘사가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에 내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로리가 마네뜨 박사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내가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것 같고, 루시가 오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릴 때는 그녀의 심정이 깊이 공감되어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가 하면 찰스 다네이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증거들로 공격받는 장면을 읽을 때는 재판장 안의 열기와 분위기, 재판을 구경하는(분명히 말하지만 방청이 아니라 '구경'이다) 사람들의 눈빛과 숨소리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재생된다. 루시와 그녀의 아버지인 마네뜨 박사가 이 재판에 원고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찰스 다네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이 때 이미 루시와 다네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데 찰스 다네이의 변호사로 같은 재판에 참석한 시드니 칼튼 역시 이 때부터 루시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 하는가!
마네뜨 부녀가 찰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는 하지만(그리고 마네뜨 부녀는 어떻게든 찰스를 변호해주려고 애썼다) 사실 증거같지도 않은 엉터리 증거여서 머리 좋은 시드니의 기지로 찰스는 무죄 방면되었다. 영국인인 시드니와 프랑스인인 찰스는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얼굴이 닮았는데, 시드니가 이 점을 이용해서 찰스를 모함한 첩자들의 증언을 무력화한 것이다. 자칫 사형당할 수도 있었던 위험에서 찰스는 시드니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십여 년 후 또다시 시드니 덕분에, 게다가 반역죄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똑 닮은 얼굴을 이용해서 목숨을 건지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디킨스의 또 다른 장점이 나온다. 바로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 소설에는 마네뜨 부녀와 로리, 찰스, 시드니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시드니의 동료 변호사인 '섬세한 남자' 스트라이버, 텔슨 은행의 심부름꾼인 제리, 루시의 헌신적인 하녀인 미스 프로스, 마네뜨 박사가 프랑스에서 살 때 부렸던 하인이자 현재는 파리의 생앙투안 거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드파르지와 그의 아내 마담 드파르지, '자크'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고통받는 민중과 방장스, 미스 프로스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살러먼 등등, 과연 이들이 서로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씨줄과 날줄을 엮듯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디킨스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앞에서 무심하게 읽어넘겼던 대화가 뒤에 가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인물의 존재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하나의 사건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뒤에 일어날 다른 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그렇다. 오랫동안 이어진 귀족 계급의 횡포가 낳은 결과가 바로 프랑스 혁명이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그 횡포의 또다른 결과로 마네뜨 박사가 자기 손으로 사위인 찰스의 고발장에 서명한 꼴이 되어 버렸다. 마네뜨 박사는 오래 전 찰스의 숙부인 에버몽드 후작이 저지른 죄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의 독방에 18년이나 갇혀 있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버몽드 후작의 가문과 그 자손까지 고발한다는 내용의 고발장을 써서 숨겨두었는데, 이것이 훗날 혁명당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찰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찰스는 자신의 가문에 회의를 느끼고 영국으로 망명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지 오래였으나, 이미 귀족의 피맛에 깊이 중독된 프랑스 민중 앞에서는 그런 근면성실함 따위는 아무 소용 없었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 계급을 내세워서 온갖 죄를 짓고도 잘못을 몰랐던 조상을 둔 죄로 그는 석방된 지 몇 시간만에 다시 재판정에 세워져서 24시간 이내에 단두대의 칼날 아래에 목을 들이대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은 그의 앞에 시드니 칼튼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신이라 해도 찰스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시드니는 영국의 첩자였던(찰스를 반역죄로 모함했던 바로 그 첩자) 간수를 위협해서 찰스가 갇혀 있는 독방으로 들어와서는 옷을 바꿔 입고 그를 약으로 재웠다. 감옥으로 들어올 때 이미 아파서 곧 쓰러질 것처럼 연기했기 때문에 간수가 잠든 찰스를 업고 나가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똑 닮아서, 그 눈썰미 좋은 마담 드파르지마저 시드니를 보고 찰스와 똑같이 생겼다며 놀랐으니까.
찰스를 잠재우기 전 시드니는 루시에게 보내는 편지를 찰스더러 대신 쓰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시간도 없지만 시드니가 신파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어서 편지는 몇 줄 뿐이었다. '오래 전 당신에게 했던 맹세를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자기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여겨 사랑하는 여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던 시드니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루시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것이 루시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일인데도. 후에 프랑스 민중의 입에 회자된 것처럼, 시드니는 성자와 같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 피의 복수가 무고한 이들의 생명까지 집어삼키는 참혹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살았다. 18년의 억울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마네뜨 박사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외동딸 루시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 먼발치에서 손키스를 보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루시를 살게 한 것은 딸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찰스가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감옥에서 1년이 넘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미스 프로스는 사랑하는 마네뜨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담 드파르지를 쏘아 죽였다. 늘 아내 탓만 하는 제리도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 남자, 시드니 칼튼은 루시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죽지 못해 살던 그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 또한 사랑이었으니, 비록 보답받지 못할지라도 루시를 향한 사랑이 그의 삶을 밑바닥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지금까지 누렸던 어떤 휴식보다도 평안한 길'을 향해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리라.
시드니보다 한 발 앞서 처형된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한낱 시골 마을의 재봉사에 지나지 않는 그녀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의 적'인 귀족을 동정하는 기색만 보여도 목이 날아가는 세상이었으니 세 치 혀로 죄 없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으나 그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혁명의 이면에는 그 당시 죽은 귀족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스의 아내와 딸까지 죽이려 하는 마담 드파르지의 무자비함, 항상 피에 굶주려 있는 자크 3호와 방장스의 모습, 단두대 앞에 모여 앉아 뜨개질을 하며 떨어지는 목의 숫자를 세는 여인들, 오늘은 단두대에서 몇 명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처럼 프랑스 전역에 퍼지고 많이 죽일수록 '기요틴이 일을 참 잘한다'며 좋아하는 일반 민중.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은 귀족 계급이 스스로 불러들인 필연적 결과이며,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을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세력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복수심에 매몰된 나머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잃은 인물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해 혁명세력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민중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몹시 씁쓸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탄압을 견디다 못해 저항하기 시작한 민중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서민의 목숨까지 뺏다니.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치닫는 혁명의 불길을 끈 것은 결국 나폴레옹 1세의 제정 수립이었다. 뿌리까지 썩은 나무는 마땅히 베어내야 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 심은 나무도 뿌리가 썩는다면 앞서 썩은 나무를 베어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긴 혼란기를 거친 현재의 프랑스는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니 '내가 죽어서 나같은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라던 어린 여자 재봉사의 죽음이 아주 헛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에 비해 시드니의 죽음의 의미는 조금 좁다. 그는 오로지 마네뜨 가족이 행복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죽었다. 그 가족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루시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루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기를,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눈물 흘리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그 여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단두대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루시는 말 그대로 세상의 전부였다. 자기가 죽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어두운 세상에 내려온 한 줄기 빛같은 존재. 그 빛이 꺼지면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해도 시드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귀한 생각을 할 리가 없고, 또 그는 영국인이므로 프랑스가 어떻게 되든 관심 밖인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영국 귀족이라면 프랑스 혁명이 영국 민중에게 미칠 영향이 두려워서라도 관심을 가지겠지만 시드니는 귀족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친구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생명은 귀한 법. 그 생명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바친 시드니 칼튼의 사랑은 더없이 고귀하다. 그 사랑이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경외심도 든다. 나라면 칼튼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내 것 하나 지키기도 힘든 요즘같은 세상에서 과연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소설은 시드니 칼튼이 죽음을 맞는 곳에서 끝난다. 지옥 같은 파리를 탈출한 루시와 그의 가족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드니가 자기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찰스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고 이는 루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전에 자신이 쓴 고발장 때문에 사위가 죽게 생기자 다시 정신을 놓아 버린 마네뜨 박사도 언제쯤 회복될지, 회복이 가능은 할지 장담할 수 없다. 미스 프로스는 마담 드파르지를 총으로 쏘면서 그 소리에 청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예전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 사랑이 그 가족 안에서는 끈끈하게 흐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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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을 펴낸 출판사에게 쓴소리 한 마디만 하고자 한다. 영문판과 번역판을 함께 묶은 구성도 좋고 번역도 괜찮고 책의 만듦새도 참 예쁜데, 교정이 엉망이다. 분명 인물이 하는 말인데도 마지막에 큰따옴표(")가 생략된 문장이 많고 오자와 탈자도 적지 않다. 인터넷이나 SNS는 몰라도 책에서는 '물어다 받친다' 같은 틀린 맞춤법이 나와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물어다 바치다'가 맞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400쪽이 넘는 책 곳곳에 이런 실수가 지뢰처럼 숨어 있어서 좀 그랬다. 앞으로는 편집과 교정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