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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평점 :
며칠 전 포털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이라는 코너에서 무척 가슴 아픈 기사를 읽었다. 지리산으로 방사되었던 어느 6년산 반달가슴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반달가슴곰은 북한에서 어렵게 들여온 대한민국 토종으로, 죽기 1년 전에는 건강한 새끼를 출산했던 어미곰이었다. 2007년과 2008년에 두 번이나 올무에 걸려서 죽을 뻔한 것을 구출해서 치료한 뒤 다시 방사했는데, 2010년 6월 또다시 야산 근처 농가에서 설치한 올무에 걸려서 결국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고 말았다. 살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올무가 연결된 통나무까지 뽑혀 있었단다.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온몸에 올무를 칭칭 감은 곰이 나무 위에 매달려 축 늘어진 영상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곰은 위기에 처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이 땅에 사는 동물들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야생 동물들이 농사를 '방해'하고 농작물을 '훼손'해서 올무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농민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동물이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가끔 인도나 부탄 같은 나라에서 코끼리 떼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습격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땐 그 코끼리들이 미쳤는갑다 싶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보면 99.9%는 습격을 당한 마을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못살게 군 전력이 있다. 밭을 일구기 위해 코끼리의 서식지를 침범했거나 심어놓은 농작물을 망쳤다고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거나 등등.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고 자연에게 저지른 죄는 반드시 돌려받게 되어 있음이다.
물론 농민들에게도 땅을 경작해서 얻은 작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 그 작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권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할 권리는 없다. 사람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단이 많지만 동물은 원래 먹고 살도록 타고난 것을 먹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다. 멧돼지나 너구리가 사람에게 앙심이 있어서 애써 가꾼 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서식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 길을 찾아 내려오는 것이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산에 있는 도토리를 싹 쓸어가는 바람에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 식량을 구하러 산 밑으로 내려왔다가 차에 치어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다.
동물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 동물 없이 사람들만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알지만 마음이 불편하니까 애써 외면하고 우리도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므로 누굴 비난할 자격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공존이 어려운 이 현실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를. 먼 옛날의 인류는 굳이 방법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수천 년을 살았다. 그 때의 인류는 가능했던 일이 왜 지금은 어려운 것일까? 인류가 지구를 떠나 어디 다른 행성에 정착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이 책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환하게 웃는 라다크 사람들의 사진이 여러 컷 실려 있다. 그 사진들을 보면 따로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을 만큼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떠오른다. 서구식 개발붐이 일어나기 전의 라다크 사람들은 늘 그런 웃음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인도의 라다크 지역 거주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이 책의 저자는 16년 동안 라다크에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본 사람이다. 야크털로 옷을 해입고 꼭 필요한 만큼의 농지만 경작하며,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는 반드시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라다크의 전통이었다. 한 집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남녀와 노소, 가족과 이웃의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돌보고 열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도 농사일과 가축 돌보는 일을 도우면서 협동심과 책임의식을 배웠다. 여자라고 해서 집안일만 하지 않고 남자라고 해서 바깥일만 하지 않았다. 여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논밭에 물을 대고 남자도 야크털에서 실을 자아내어 옷을 지어 입는 것이 라다크 사람들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티베트에서 전수받은 대승불교 신자지만 소수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과도 상부상조하고 때로는 혼인관계까지 맺으면서 잘 지냈다. 종교 분쟁, 양성 갈등, 빈부 격차의 심화, 환경 파괴, 소수자 차별 따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삶의 방식을 그들은 20세기까지도 유지해왔던 것이다.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를 중재해주는 마을의 큰어른 같은 사람이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이 각자의 책임을 인정하고 좋게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어서 남이 기분 상할만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았다. 당연히 증오나 원한으로 인한 범죄도 없고 계급이 존재하기는 해도 그 차이가 크지 않아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지사. 책에 실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라다크 사람들의 밝고 자연스러운 웃음은 이러한 자부심과 확고한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다. 억지스럽고 때로는 불쾌한 코미디나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음을 얻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라다크의 장점만 잔뜩 써놓았지만 그 사회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기후 때문에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고(15%) 평균수명이 현대화된 사회보다 낮으며, 문맹률도 높다. 우리가 편의시설이라고 부르는 난방장치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해발 1만 2000미터의 고원에서 척박한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온 라다크 사람들은 생각보다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가스보일러나 히터같은 현대적인 난방장치가 없을 뿐이지 동물의 배설물을 말려서 난로에 넣어 태우는 식으로 겨울을 날만큼 자연환경을 체화한 것이다. 평균수명이 낮은 대신 라다크의 노인들은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강을 평생 유지하며 암이나 당뇨같은 질병은 알지도 못하고 농경과 가축 기르기가 중심인 사회의 특성상 죽을 때까지 할일이 있다. 삶의 질이 높다는 뜻이다.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고 개선해야 할 점이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죽음을 비극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불교의 윤회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죽음을 자연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서 죽은 아이가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거라는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이들이 곧잘 죽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기름보일러조차 없는 라다크가 낙후된 사회, 뒤떨어진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낙후된 면'에 대한 대안이 없다면 모를까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라다크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약점을 보완하면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라다크 주민의 대부분은 글을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의 사안에 대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지배계층에게 착취당하는 것은(애초에 지배계층 자체가 없는 것 같지만) 라다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서로 협력하면서 가족과 이웃들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루는 것. 오늘날 우리가, 그리고 현재의 라다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라다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에서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왜 인류는 동물과, 나아가 자연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가? 해답은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다'는 데 있다. 정확히는 '개발된 현대사회에서 사는 일부의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개발은 자연을 싸워서 이겨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해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산을 깎아 터널과 도로를 만들고, 물길을 바꾸고, 온갖 폐기물과 쓰레기를 파묻어서 토양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발전'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싼 다음 라다크처럼 현대화되지 못한, 그러나 개발 없이도 수천 년간 유지해온 사회에 강제로 들이미는 것이 문제인 거다.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개발의 결과로 우리는 라다크 사람들보다 훨씬 잘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면이나 생활의 편리성에서는 그들보다 앞서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전통사회의 라다크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병을 전혀 몰랐고, 저자에게서 서구사회에는 그런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왜 사람의 마음에 그런 병이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다크의 전통사회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강박장애 등 현대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명상이나 자연수련 등으로 얻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그들에게는 일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저자는 라다크의 전통 생활방식이 바뀌는 것도 안타까워했지만 무엇보다 라다크 사람들이 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열등감과 자기 부정에 시달리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부를 축적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 한순간 자본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내가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신경쓰기 시작했고 현대화의 어두운 면은 전혀 모른 채 서구식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과 옛 가치관은 낡아서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해 버렸다. 술을 담그고 남은 찌꺼기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던 라다크 사람들이 썩지 않는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내놓기 시작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무분별한 건축과 도로 건설로 동식물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책이 출간된 2007년까지도 도심에서 먼 지역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저자는 썼는데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여러 NGO 단체와 라다크의 지성인들이 진행하는 '라다크 프로젝트'가 계속 성과를 거두고 있어야 할 텐데.
현대화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개발을 잠시만 늦추고 우리가 괴롭혀온 자연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서 외면받고 있을 뿐 라다크에 전기와 석유 대신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물을 짓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과 친해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먹을 것과 집 짓는 재료, 난방연료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었고 필요한 만큼만 썼으며 그래도 남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재활용을 했다. 누가 가르쳐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것도 혹시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주장에 공감한 이유는 그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더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문제삼은 것들을 나도 몇 년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무분별한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문제 뿐 아니라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문명인인 우리가 소위 비문명인인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없는 정신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개발이, 현대화가, 문명사회가 그토록 풍요롭고 무결점하다면 우울증으로 자살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비극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끼며 살아도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가는데, 뉴스에서는 상반기 무역흑자를 얼마 달성했다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나 떠들어댄다. 국민 전반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우러러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일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개발 논리에 물든 사고방식에서 먼저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처음엔 페이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리뷰가 돼 버려서 카테고리를 바꿨다.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 남아 있었던 한 챕터와 에필로그까지 다 읽었고, 점점 극으로 치닫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힌트도 어느 정도 얻었다. 저자처럼 국제 NGO를 결성해서 여러 나라를 오가며 강연활동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점을 알리고 함께 생각을 바꿔 나가자고 권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높디높은 산도 결국은 작은 모래와 흙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웰빙이나 유기농식품, 자연치료법 등 자연적인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이 흐름을 한 차원 높여서 계속 이어간다면 분명 개발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