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이후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 힘든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부단히 자신을 세상에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의 글 형식이 계속 바뀐 것도, 1886년에 저작들을 재간행하면서 서문들을 추가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중에서도 «이 사람을 보라»는 그런 노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이 필요하다”(KSA 5, 57)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라»는, 니체에 대하여 가장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니체라는 사람(homo)을 보라(ecce)고 가리키는 지시어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을 보라»는 “나에 대하여 약간의 빛과 충격을 퍼트리려는 시도”이다.(KSB 8, 471)

니체를 비추는 “약간의 빛”, «이 사람을 보라»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인용문들로 점철되어 있다. 거의 모든 장마다 빠짐없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글이 아니다. 마침내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직접 말한다. “나는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겠다”로 시작되는 이 장은 마치 난만하게 피어나던 오케스트라가 무너지고 주제선율만 외로이 흐르기 시작하는 인상을 준다. 니체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으로 꼽을 만하다.

이 대목, 즉 “이 사람을 보라 >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들을 쓰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정독하는 김에 기존 번역본들을 검토해 보았다. 국내에서 니체가 어느 정도나 이해되고 있는가, 아니 어느 정도나 오해되고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국내번역본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1. 곽복록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976, 20072, 동서문화사)
  2.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1982, 청하)
  3. 백승영 역, «바그너의 경우·우상의 황혼·안티크리스트·이 사람을 보라 . . .»(2002, 책세상)

곽복록 역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일 제목과는 달리 «비극의 탄생», «아침놀»,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책으로, 197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최근 2007년에 새로 출간되었다.
 

먼저, 1절에서 문제시 할 수 있는 번역 대목을 살펴보자. 니체는 1절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의 시작과 마무리를 이야기한다. 이는 차라투스트라의 역사의 출발점인 1881년 8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을 전후한 시기를 의미한다. 그중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전제 조건이 되는 “듣는 법에서의 재생”과 관련한 경험 대목:

sicherlich war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 eine Vorausbedingung dazu. In einem kleinen Gebirgsbade unweit Vicenza, Recoaro, wo ich den Frühling des Jahrs 1881 verbrachte, entdeckte ich, zusammen mit meinem maëstro und Freunde Peter Gast, einem gleichfalls “Wiedergebornen“, daß der Phönix Musik mit leichterem und leuchtenderem Gefieder, als er je gezeigt, an uns vorüberflog.(1절)

확실히 듣는 법에서 재생이 있었다. 이것이 예비조건이었다. 비첸차에서 멀지 않은 어느 조그만 산중 온천 레코아로에서, 내가 1881년 봄을 지냈던 곳에서, 나의 벗, 음악가 페터 가스트, 나와 마찬가지로 “재생한 자”와 함께, 나는 음악이라는 불사조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보다 더욱 가볍고 더욱 빛나는 깃털로 우리 곁을 스쳐 비상하는 것을 발견했다.

곽복록 확실히 듣는 기술의 부활이 그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조그만 산간 온천장에서 (…) 여기서 나는 내 음악 교사이며 친구인, 나처럼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김태현 확실히 듣는 예술이 나에게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이 사상에 대한 전제조건이었다. 베네치아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레코아르라는 작은 산 온천에서 (…) 거기서 나는 나의 음악가이며 친구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이 사람도 또한 “<다시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백승영 확실히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 (…) 베네치아에서 멀지 않은 레코아로라는 작은 산간 온천에서 나는 내 스승이자 벗이며 그 역시 ‘다시 태어난 자‘인 페터 가스트와 함께

위 인용문은 실스 마리아의 경험이 있기 두 달 전에 음악적 취향에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것을 서술하는 대목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대목인데 불가사의하게도 모두 이상하게 번역했다. 먼저, “eine Wiedergeburt in der Kunst zu hören”은 “듣는 법에서의 재생”, 또는 “듣는 기술에서 다시 태어남” 정도로 번역해야 하는데, 백승영은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예술 안에서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고, 그 부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었다”로 오역하는 동시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했다. 또한 “Wiedergeburt”는 “재생, 거듭남”의 의미로서 “부활”(Auferstehung)과는 명백히 다른 낱말이다. 이들 낱말이 모두 루터번역성서에서 중요한 의미로 쓰이는 것을 알고 있다면, “Wiedergeburt”는 “재생, 다시 태어남, 거듭남”으로 옮겨야 한다. 특별히 뒷 문장에서 “Wiedergeborner”(재생한 자, 다시 태어난 자)와 호응을 이루고 있는만큼 같은 낱말로 번역해야 하는데도, “부활/다시 태어남”(곽복록, 백승영)으로 다르게 옮긴 것은 의아하다. 그리고 “maëstro”는 그냥 “음악가”로 옮기면 되는데 “음악 교사”(곽복록), “스승”(백승영)으로 옮긴 것도 눈을 의심케 한다. 페터 가스트는 니체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그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Vicenza”는 “비첸차”인데 한결같이 “베네치아”로 옮긴 것은 또 무엇인지.
 

실스 마리아에서의 경험 직후 «즐거운 학문»을 출간하고 이후 곧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내놓았던 만큼,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리는 “백 가지 조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즐거운 학문» 제4부 마지막 절인 342절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서설의 시작이 될 대목을 먼저 싣고 있으며, 바로 그 전절인 341절은 그 유명한 “최대의 무게”라는 제목으로 영원회귀 사상을 알리고 있다. 그러니까 «즐거운 학문» 제4부 342절이 곧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시작 대목이기에 니체는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다”고 했으며, 바로 그 앞절은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고 했다.

In die Zwischenzeit gehört die “gaya scienza”, die hundert Anzeichen der Nähe von etwas Unvergleichlichem hat; zuletzt giebt sie den Anfang des Zarathustra selbst noch, sie giebt im vorletzten Stück des vierten Buchs den Grundgedanken des Zarathustra.(1절)

“즐거운 학문”은 그 중간기에 속하거니와 그것은 무엇에도 비할 바 없는 그 뭔가가 접근하는 백 가지 조짐이다; 급기야 그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시작마저 내놓고 있으며, 제4부 마지막 바로 전 절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사상을 내놓고 있다.

곽복록 결국 그것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첫머리를 그대로 싣고 있고 제4권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부분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현 결국 그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부분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 제4권 2절에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승영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이고, 그 4부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근본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형성사를 면밀히 검토했다면, “결국 «즐거운 학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두 자체”(백승영)라는 번역을 할 수 없다. 백승영 번역본이 그나마 나은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부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실망이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니체가 원문에서 별도의 괄호나 기호 없이 “차라투스트라”로 지칭하고 있을 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책과 인물을 동시적으로 가리키고 있어 자못 풍요로운 의미를 띤다. 번역할 때에도 그 의도를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2절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로 “위대한 건강”을 꼽고 있으며, 이에 관한 상세한 안내문으로 «즐거운 학문» 제5부 382절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전집번역이라면 두 번역자의 번역내용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흥미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책세상 번역본은 백승영 역의 «이 사람을 보라»와 안성찬·홍사현 역의 «즐거운 학문» 번역문이 동일하다. 나중에 간행된 안성찬·홍사현 역이 백승영 역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도 그대로 따랐다.

für den das Höchste, woran das Volk billigerweise sein Werthmaß hat, bereits so viel wie Gefahr, Verfall, Erniedrigung oder, mindestens, wie Erholung, Blindheit, zeitweiliges Selbstvergessen bedeuten würde; das Ideal eines menschlich-übermenschlichen Wohlseins und Wohlwollens, welches oft genug unmenschlich erscheinen wird, zum Beispiel, wenn es sich neben den ganzen bisherigen Erdenernst, neben alle bisherige Feierlichkeit in Gebärde, Wort, Klang, Blick, Moral und Aufgabe wie deren leibhafteste unfreiwillige Parodie hinstellt - und mit dem, trotzalledem, vielleicht der große Ernst erst anhebt, das eigentliche Fragezeichen erst gesetzt wird, das Schicksal der Seele sich wendet, der Zeiger rückt, die Tragödie beginnt . . .

그 정신에 비하자면, 군중이 당연하게도 그들 자신의 가치척도로 삼고 있는 최고의 것이 숫제 위험, 타락, 비천함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며, 그게 아니라면 고작 회복,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 따위를 뜻하기 마련이다; 인간적인-초인적인 복된 존재와 복된 의욕의 이상은 빈번하게 진정 비인간적으로 비칠 때가 있는 바, 예컨대 그것이 ‘몸짓·말·소리·시선·도덕·과제’를 빌어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도 비자의적인 패러디’를 빌어서 기존 지상의 진지함 전체와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기존의 온갖 엄숙한 것들과 함께 나란히 제시될 때 그렇다 —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위대한 진지함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본연의 물음표가 처음으로 제기되리니, 영혼의 운명이 회전하고, 시계바늘이 움직이고, 비극이 시작된다 . . .

곽복록 당연히 가치 척도로서 갖고 있는 최고의 것이 이러한 이상의 정신은 민중에게는 위험, 타락, 굴욕 같은 것 아니면, 최소한 휴양이나 맹목성, 일시적인 자기망각 같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이제까지 지상에서 진지하던 몸짓, 말, 음향, 시선, 도덕 과업을 이루기 위한 온갖 의식 옆에 이상이 그것들과 가장 닮은 풍자시처럼 놓인다면, 그 인간적이면서도 초인간적 안녕과 호의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진지함으로 시작되고 본연의 의문 기호가 찍힐 것이다. 그러면 영혼의 운명이 방향을 바꾸고 시계 바늘이 움직이며, 그곳으로부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김태현 이러한 이상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가치기준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최고의 것이란 단순히 위험, 쇠퇴, 저하, 기껏해야 휴양, 맹목, 일시적인 자기망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를 들면 이러한 이상이 지상의 모든 진지함, 몸짓, 말, 소리, 눈, 도덕, 사명에 있어서의 모든 장엄함과 대면케 되면 인간적 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 그 이상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구체화된 조롱 시가 되는–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 이상으로써 위대한 진지함이 진정으로 시작되리라.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여 비극은 시작되리라.

백승영 이 이상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자기들의 가치 기준으로 당연시하고 있는 최고의 것은 위험이나 쇠퇴나 저하를 의미하게 되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기껏해야 휴양이나 맹목이나 일시적인 자기 망각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적-초인간적인 행복과 선의라는 이상이지만, 종종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지상의 진지함 곁에서,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에서 그렇다–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과 더불어 위대한 진지함이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진정한 의문부호가 비로소 찍힐 것이다. 영혼의 운명이 바뀌고,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난해한 대목이다. 위 인용문의 앞 문장에서는 “이제까지 ‘성스럽다’, ‘선하다’, ‘불가침이다’, ‘신성하다’고 칭한 모든 것과 더불어 유희하는 정신의 이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정신 혹은 그 정신의 이상에 비하자면 사람들이 최고의 것으로 받들고 있는 것들(가령 ‘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들)은 ‘위험’, ‘타락’, ‘비천’에 불과하며 잘 봐줘도 사람들이 생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회복’, ‘맹목’, ‘자기망각’을 뜻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니체의 강조점이다. 그런데 그 정신의 이상이라는 것이 제시될 때에는 기존의 언어, 예술, 입장, 도덕, 과제 등을 빌어서 (혹은 그것들의 패러디를 빌어서) 제시될 수밖에 없는 바, 필연적으로 인간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양면을 띠게 되며, 더 나아가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치게 된다. 가령, 니체가 애용하는 말인 ‘악’, ‘악의’ 등이 그렇다. 이것은 도덕의 용어를 빌어서 제시되는 것이자, 기존의 엄숙함을 대표하는 최고가치인 ‘선’, ‘신성’과 함께 나란히 제시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언어를 빌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그러면서도 기존 언어의 의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초인적이며, 그리하여 기존 지상의 가치들을 파괴하면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다. 요컨대, ‘악’이 ‘신성함’과 더불어 유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르는 바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기 위한 생리학적 전제인 것이다.

이 구절에서 곽복록과 김태현의 번역은 별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안 좋다. 백승영의 번역이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한데, 헤매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첫 문장의 우리말 표현이 매우 어색하거니와 “이 이상에 대해서는”이 아니라 “이 정신에 대해서는”으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몸짓이나 말이나 소리나 시선이나 도덕이나 과제에 있어서의 온갖 장엄함의 곁에서, 그 이상이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 대한 패러디로 구현되어 제시되는 경우”라는 번역문 역시 원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몽롱한 문장이다. “가장 생생한 (패러디)”를 누락한 것도 의외다.
 

위와 같은 니체의 심오한 문장처럼 철학적 논증을 거쳐 의미를 확정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장을 잘못 번역해도 (심지어는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해도) 이를 지적하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나마 구문을 잘못 파악하여 결정적으로 오역이 발생했다면 이를 지적하는 일은 수월한 편인데, 이런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는 문장의 의미나 낱말의 뉘앙스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해 오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3절의 경우에도 그렇다.

Es scheint wirklich, um an ein Wort Zarathustra’s zu erinnern, als ob die Dinge selber herankämen und sich zum Gleichnisse anböten (- “hier kommen alle Dinge liebkosend zu deiner Rede und schmeicheln dir: denn sie wollen auf deinem Rücken reiten.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 Hier springen dir alles Seins Worte und Wort-Schreine auf; alles Sein will hier Wort werden, alles Werden will von dir reden lernen -”).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 듯하다 (— “여기에서 모든 사물들이 쓰다듬으며 너의 설법을 향해 다가오고 너에게 살랑댄다: 그것들은 너의 등에 올라타고 싶은 것이다. 너는 여기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 여기에서 너를 위하여 모든 존재의 말이 문득 열리고 말의 상자가 문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에서 말이 되고자 한다, 모든 생성은 너로부터 설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

곽복록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떠올려 보면 거기에선 마치 사물들이 다가와서 자기를 비유적으로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사물은 애무하면서 그대의 역설에 다가와서 아첨한다. 그것은 그대의 등을 타고 가려하기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모든 비유를 타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튕겨 열린다. 모든 존재가 말이 되려 한다. 모든 생성이 그대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김태현 실제로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을 보면 암시를 얻을 수 있는데 모든 사물은 스스로 접근해 와서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모든 것은 너의 말이 있는 곳에 달래는 듯이 다가와 아첨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의 등에 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는 비유를 타고 어떠한 진리에도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말이 되기를 원한다. 모든 생성은 너에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백승영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억해보자면 어떤 것이 제 스스로 다가오고 스스로 비유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여기서는 모든 것이 어리광을 부리며 네가 하는 말로 다가와 네게 아첨하리라: 모든 것이 네 등에 업혀 달리려 하기 때문이다. 너는 여기에서 온갖 비유의 등에 올라타고 진리를 향해 달린다. 여기서 모든 존재의 말과 말의 상자가 너를 향해 활짝 열린다; 모든 존재는 여기서 말이 되고자 하며, 모든 생성은 네게서 말하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3절에서 니체는 실스 마리아에서의 결정적인 경험을 두고 “영감”의 사례로 소개한다. 심심미묘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자들은 표현 하나하나에 예민해야 한다. 가령, 운명을 뒤바꾼 결정적인 경험의 순간에 사물들이 니체에게 다가온 장면을 두고, 모든 사물들이 아첨한다느니 어리광을 부린다느니 표현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역자들이 니체의 경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그저 독한사전만 보고 하나같이 “아첨하다”로 옮겼나본데, 안타까운 일이다. 동일한 견지에서, “Auf jedem Gleichnis reitest du hier zu jeder Wahrheit”의 “jede-” 역시 정확하게 “저마다의 비유/저마다의 진리” 내지 “각각의 비유/각각의 진리”로 번역해 주어야 마땅하다. “저마다의 진리를 위하여 저마다의 비유에 올라탄다”는 문장은 “진리를 위하여 비유를 탄다”나 “진리를 위하여 온갖 비유를 탄다”는 문장과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번역하지 않는가?
 

다음 4절은 소위 ‘팩트’의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4절에는 니체가 독일식 지명으로 표기한 “Nizza”와 “Eza”가 등장한다. 이곳들은 현재 프랑스 영토의 “니스”와 “에즈”이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니스”는 제대로 표기하고선 “에즈”를 “에쯔아”나 “에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그들의 불성실에 대한 증거이다. 이러한 불성실은 2절의 “ein Göttlich-Abseitiger alten Stils”(옛 풍습처럼 신성하게 제정신을 벗어난 자)를 “옛 방식으로 신이 들려 괴상한 자”(백승영)으로 옮긴 데에서도 확인된다. 이 개념이 적어도 플라톤의 이온이나 파이드로스에서 유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면 “괴상한 자”라고 옮길 수 없다.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 신이 들린 자”(곽복록), “구식으로 신들린 자”(김태현)로 옮기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문체적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반복되는 동사의 빈번한 생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략은 일반적인 독일어에서는 허용되기 힘들 정도이지만, 니체가 그렇게 한 것은 우선은 문장의 리듬 때문일 것이며, 특히 생략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생략하는 희랍어·라틴어의 구문에서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로마시인들로부터 문체를 배웠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Ein Andres ist die schauerliche Stille, die man um sich hört. Die Einsamkeit hat sieben Häute; es geht Nichts mehr hindurch. Man kommt zu Menschen, man begrüsst Freunde: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서 듣는 으스스한 정적이다. 그 고독은 일곱 겹의 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벗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적막이 인사할 뿐, 더 이상 그 어떤 시선도 인사하지 않는다.

곽복록 사람들에게로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도 말이다.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

김태현 사람들, 친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본다. 그러나 더 많은 고립감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따뜻한 눈으로 반겨주지 않는다.

백승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구들에게 인사하지만: 새로운 황무지는 어떤 인사의 눈길도 더 이상 보내지 않는다.

밑줄 그은 문장은 “neue Öde grüsst, kein Blick grüsst mehr” 내지 “kein Blick grüsst mehr, sondern nur neue Öde [grüsst]“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니체는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생략하여 “neue Öde, kein Blick grüsst mehr”로 썼다.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문체에 익숙하지 못한 역자들은 잘못 옮기고 말았다. 다만 곽복록은 “새로운 적막이 감돌고 더 이상 인사하는 눈초리라곤 없다”고 의역하여 체면치레를 하고 있다. 그동안 니체 번역서들을 살펴본 결과, 역자들이 니체의 생략구문을 놓쳐서 의미를 잘못 파악하여 저지른 오역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니체 오역의 사례 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례는 다름아닌 정반대로 번역한 경우이다. 설마 그런 경우가 있으랴 의문을 품을 만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런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5절의 마지막 구절이 그렇다:

Ich wage noch anzudeuten, daß man schlechter verdaut, ungern sich bewegt, den Frostgefühlen, auch dem Mißtrauen allzu offen steht, - dem Mißtrauen, das in vielen Fällen bloß ein ätiologischer Fehlgriff ist. In einem solchen Zustande empfand ich einmal die Nähe einer Kuhheerde, durch Wiederkehr milderer, menschenfreundlicherer Gedanken, noch bevor ich sie sah: das hat Wärme in sich …

내가 과감하게 암시까지 해주겠거니와, [그런]사람들은 소화력이 좋지 않으며, 움직이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한기寒氣와 불신에 대하여 너무나 활짝 열려 있다, — 불신은, 대개 병인病因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일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그것은 온기를 품고 있느니 . . .

곽복록 그런 사람은 소화를 잘 못 시키고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고 한기나 불신감에 내맡겨져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대개 단지 병원학적인 실책에 불과한 불신감에 말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을 보기도 전에 말이다. 온화하고 어진 생각 자체는 온기를 지니고 있다.

김태현 그여기서 감히 부언해 둘 것은 그렇게 되면 우리의 소화능력은 감퇴하고 게으르게 되고 한기에 너무 민감하게 되고 불신감에 걸리고 만다. 그 불신감이란 대개 단순한 병원학적인 착오에 불과한 것이지만 내가 그러한 상태에 있었을 때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 그때 나는 한 우리의 소떼가 나에게 접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들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백승영 그런 사람들은 소화도 잘 못 시키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며, 얼어붙어버리고 지나치게 불신감에 개방되어 있다고 나는 감히 암시한다—여러 경우에서 단지 병인학적 착오에 불과한 불신감에. 그런 상태에서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 나는 소떼가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그것을 미처 보기도 전에: 그것은 온기를 지니고 있었다……

니체는 제5절에서 불멸의 성과를 이룬 자가 치를 수밖에 없는 값비싼 댓가/보상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마지막 세번째가 위에 인용한 대목으로, 창조력을 모두 소비하고 나면 모든 방어력이 소진되면서 사소한 상처에도 민감한 피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소화력도 좋지 않고 움직이기를 힘들어한다. 그리고 “한기와 불신”에 대하여 무방비로 열려 있게 된다. 즉 그들은 한기와 불신 자체가 된다. “불신”은 대개의 경우에 병인을 잘못 짚어 질병이라고 진단한 것에 불과할 뿐이요, 불멸을 이룬 이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불신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사랑”이니 “행복”이니 하는 (한기와는 정반대인) 온화한 사상들이 접근하는 조짐만 보여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상태에서 나는 암소떼의 접근을 감지한 바 있다, 암소떼를 채 보기도 전에,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이 회귀하는 것을 단서로 하여 . . .”라고 말한다.

이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설 제3절을 함께 음미할 필요가 있다:

보라! 나는 너희에게 최후의 인간을 선보이겠노라.

“사랑이 무엇이냐? 창조가 무엇이냐? 그리움이 무엇이냐? 별이 무엇이냐?” — 이렇게, 최후의 인간은 묻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후 대지는 왜소해졌으며, 만물을 왜소하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은 대지 위를 날뛰고 있다. 그의 생식은 잎벌레처럼 근절될 수 없다; 최후의 인간이 가장 장수한다.

“우리는 행복을 창안했다”라고 —, 최후의 인간들은 말하고는 눈꺼풀을 떤다.

그들은 살기에 혹독했던 지역을 떠났다: 사람들은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마찰한다: 온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듦과 불신을, 그들은 죄악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아직도 돌부리나 인간에게 채여 비틀거리는 멍청이.

다름아닌 “사랑”, “행복”, “온기”는 최후의 인간의 언어이다. 최후의 인간은 “병”과 “불신”을 죄악으로까지 여긴다. 그렇게 그는 “좀더 온화한 사상들”과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을 설파한다. 그가 “창조”라는 말을 꺼내면 그 “창조”라는 말도 온화한 사상이 되어 타락하게 된다. 이 최후의 인간과 그를 따르는 인간들을 두고 차라투스트라는 통탄한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

이제 우리는 앞선 인용문에서 “암소떼”가 무엇이며 “온기”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어진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곽복록), “더욱 온화하고 더욱 인자한 사상이 나에게 다시 떠올랐고”(김태현), “어느 땐가 더 온화하고 더 인간 친화적인 사유가 내게 돌아오면서”(백승영) 등의 번역이 니체의 의도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정반대로 번역했다! 무엇이 차라투스트라이고 무엇이 최후의 인간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번역!

바로 이런 대목이 니체 독해의 어려움이며, 바로 이런 대목이 국내 니체 번역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나는 다른 니체 텍스트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례를 빈번하게 마주쳤다. 그리고 이런 대목은 어느 한 번역본만 오역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번역본이 동일하게 오역한다는 사실이 무척 뼈아프다.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니체 번역이 나오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외에 사소한 오역들도 언급하자면 끝이 없겠으므로 이만 줄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해 보자면, «이 사람을 보라»의 번역본들을 일부분 비교하면서 검토해본 결과, 김태현 역본은 과연 동일한 텍스트를 토대로 번역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오역이 비일비재하여 이 번역본으로 읽고서 과연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읽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곽복록 역본은 아마도 일역본도 함께 참고했는지 어휘가 풍부하며 가장 매끄럽게 읽히지만 대책없는 오역을 한 경우가 많다.

이들에 비하자면 백승영 역본이 오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긴 한데 문체나 어휘의 유려함에서는 곽복록 역본에 미치지 못한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백승영은 니체전집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의 번역본을 검토해 보건대 그 말은 과장이 아니겠나 한다. (하긴 백 번을 읽는다한들 니체가 이해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면밀한 독해는 하지 못한 것같다. 내 판단으로는, 그의 번역은 일곱 번의 독해에 값하는 번역이 아니며, 시간에 쫓겨 서둘러 번역한 인상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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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 - 새로운 경허읽기
일지 지음 / 민족사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세인들이 이르기를 경허화상은 변재가 있고 그가 설한 법은 비록 고조사古祖師라고 할지라도 넘어설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저 제멋대로일 뿐이요, 아무런 구속도 없이 음행과 투도를 범하는 일조차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의 선류禪流들은 이를 다투어 본받아 음주식육이 보리와 무관하고 행음행도行淫行盜가 반야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다투어 말하고 이를 대승선이라 하여 수행이 없는 잘못을 엄폐가장하여 모두가 진흙탕으로 들어갔으니 이러한 폐풍은 실로 경허에서 그 원형이 시작된 것이다. 총림은 이를 지목하여 마설魔說이라 해야 할 것이다.”(6) — 근대불교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능화는 1908년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능화의 평가는 <경허집>이 간행(1943년)되기 훨씬 이전에 내린 것으로 애시당초 흠결이 크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사례는 양식있는 학자가 선승들을 평가하는 기준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일례로, 신라하대의 선불교 전래 초창기에 도의선사의 가르침이 “마어魔語”로 지목되어 도의선사가 변방의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였던 일이 새삼 되풀이되는 듯하다. 이것은 구한말의 경우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동국대의 경우 불교재단인 탓에 그곳에 소속된 불교학자들은 고승들의 평가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반면, 일반대학의 철학과 등에 소속된 불교학자들은 선불교에 대하여 매우 신랄한 평가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점논쟁에서부터 조계종 종조 논쟁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중국선불교 법맥이나 선불교 자체에 대한 뜨거운 힐난에 이르기까지, 나도 그런 평가를 여러 차례 접한 바 있다.

나는 이러한 사례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지속적으로 되풀이될 것으로 믿는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범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법이며, 학자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학자들은 자신의 지식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특이한 부류의 실존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무리 안에서는, 마치 스타크래프트 게임처럼, 서로간에 우열이 명확히 갈리면서 우위에 서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이 학자들의 무리에서 벗어나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만다. 문제는 학자들이 불법의 종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면서도 스스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선을 넘어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가령, 선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둥, 혜능의 법맥은 완전히 조작이라는 둥, 요컨대 단편적인 역사학적 방법론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학자들이 불교에 대해서는 많이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학자로서 불교에 대하여 제아무리 박식하더라도 조주의 無字, 이 한 글자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과연 그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한 위인의 일생을 두고 이를 소비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허의 일생은 어느 누군가에 의하여는 공중을 나는 새의 자취처럼 흔적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반면에, 시장의 파리떼처럼 몰려든 대중들에 의해 마음껏 소비되는 모욕을 겪기도 한다. 학자들은 그런 대중들과는 다르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조금 낫긴 하겠지만 최후의 관문에서는 결국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든다. 경허는 학자들에 의하여 성실하게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 가르침에 관한 한 나는 학자들의 편에 서지 않으며 철저하게 수행자들의 편에 선다. 학자들은 자신이 평생을 고투하며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의견을 피력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답답한 갈증만 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내 생각으로는 수행자들이 학자들보다 훨씬 성실했으면 성실했지 일반적인 짐작처럼 놀고먹는 게 전혀 아니다. 그러니 학자들이 고승들의 평전을 쓴다한들 나의 기대치에는 한참 모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나아가, 엄밀한 고증을 결한 채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치우쳐 쓴 문학가의 고승열전은 실망을 넘어 차라리 책을 집어들지 않는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학자들은 그나마 엄밀한 고증이라도 있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고승평전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아시다시피, 그들은 침묵을 택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스님의 경허평전,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민족사 2001)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이 저작은 “새로운 경허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니, 이는 세간에 유포된 진부하고 속악한 소문들을 일소하고 새롭게, 경허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경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군거림과 애증들은 속악俗惡한 조연들의 부질없는 소음에 불과하다. 그토록 큰 정신의 혈맥을 남기고도, 그토록 멀리 선禪의 하늘을 비행한 인물들 가운데 경허처럼 소문과 억측의 고독 속에 홀로 서 있는 희생자는 모든 사상의 역사에서도 드문 것이다.(9)

그래서 저자는 수년 간에 걸쳐 경허의 체류지들을 답사했고, <경허집>을 몇 번이나 숙고하며 읽었다. 그는 “선승 경허를 두고 들려오는 세간의 진부한 전문傳聞, 소설로 쓰여진 경허상에 구토를 느끼고”(9), “소수의 독자들만을 위한 책”(10)을 썼다. 다름아닌 이런 평전을 고대했던 나는 일지스님이 말한 그 소수의 독자가 아닐까 한다. 일지스님에 관하여는 언젠가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는 매우 예외적인 부류의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다. 서문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경허는 실종자이다.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자 혜초의 실종은 지리적으로 광대하지만 경허의 실종과 불귀不歸는 망국亡國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의 실종과 불귀에는 조선적인,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되어 있다.

이제 나는 그의 실종을, 그가 소멸한 길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는 왜 스스로 이단자라는 운명을 감수하고 저 북방고원의 방랑자로서 쓸쓸히 소멸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호하고자 한다. 그 변호는 경허선鏡虛禪의 비밀을, 경허의 영광과 비극을 오늘의 언어로 복원하는 작업인 것이다.(10)

위 문장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선어록의 어휘가 아닌 인문학적인 언어(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오늘의 언어”)를 발견한다. 그리고 “실종”, “불귀”, “비극”, “소멸”, “방랑자”, “쓸쓸함” 등등의 어휘에는 선불교 수행자의 담박함이나 예리함이 아닌 고뇌하는 어느 젊은이의 형이상학적 질병의 냄새가 묻어있다. 그러나 그는 그 단계에서 좌초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치 유마거사처럼 질병을 가칭하여 그 질병의 언어로 선불교의 고원한 경지에 불굴의 의지로 육박하고자 한다. 이것이 일지스님의 글이 뿜어내는 매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그 질병의 언어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다.)

특히 일지스님의 글이 가진 가장 큰 장점들을 꼽자면, 첫째, 선승들의 뼈를 깎는 수행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다는 점, 둘째, 엄밀한 고증이 항상 동반된다는 점, 셋째, 그 스스로 경전의 숲에서 방황하며 캐낸 보석들을 아낌없이 베푼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경허평전은 경허의 서사를 따라가는 데 급급하지 않다. 도리어, 그 스스로 방황하고 부딪히면서 얻어낸 것들을 토대로 심원하고 광활한 불교의 세계를 펼쳐놓고, 그 세계에 경허를 들여보낸다. 때로는 불교의 세계를 설명하느라 서사의 긴박감이 떨어지는 면이 있으나, 속악한 소문들을 걷어내고 경허가 한바탕 노닐었던 무대를 제대로 복원하려는 저자의 의도임을 고려하고 십분 이해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서 저 유명한 “콧구멍 없는 소”를 언급했던 이처사는 물론이고 <경허집>에 등장하는 “태평상인”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허가 북방의 고원을 바람처럼 떠돌 때 그에게 밥 한 끼 대접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경허의 법맥과 관련 있는 고승들에 대한 자료조사는 얼마나 엄밀했겠는가. 그리고 그런 내용들을 장황하지 않게 꼭 필요한 대목에 꼭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고 다시 심원한 선의 세계로 침잠하는 저자의 글솜씨는 가히 탁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글솜씨에만 달린 문제이겠는가? 이미 삼십대 시절에 <전심법요>, <임제록> 등의 선어록 및 여러 경전들을 번역했던 저자는 선불교와 경전의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경허의 기행, 경허의 한 마디가 어느 수백 년 전, 어느 수천 년 전의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인가를 추적하여 그 결과물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기도 한다. 물론 이 결과물은 학문적인 전거보다는 정신적인 전거를 통해 얻어낸 것이다. 환채의 예를 들어보자:

경허는 인간의 명암이 쉴새없이 교차하는 궁극의 지점을 이미 보고 스스로 환채還債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선가에서는 숙업의 여파를 다스리는 것을 환채還債라고 한다. 환채란 ‘빚을 갚는다’는 뜻으로 선불교 특유의 업사상을 보여 준다. 이미 깨달았지만 남아 있는 숙업의 여파는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임제의현의 법어에도 실려 있는 “다만 인연을 따라 옛 업을 녹일 뿐(但能隨緣消舊業)”이라는 표현이 바로 환채의 실상이다.

선종의 제2조 혜가 역시 환채의 길을 걷고 있다. 혜가는 자신의 법을 이은 승찬에게 뒷일을 당부한 다음 말했다.

“나는 이제 업도(동위의 수도)로 가서 묵은 빚을 갚으려한다(吾[今]日往鄴都還債).”

그 후 혜가는 남은 생을 도회의 거리에 묻어 버리고 만다. [...]

황벽희운 또한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니 어찌 구구하게 살겠는가? 다만 인연 닿는 대로 구업舊業을 받아들일 뿐 짓지 않는다”고 환채의 사상을 말한다.

경허의 시 <진응강백답송>은 바로 환채의 노래이다.(220, 221)

<진응강백답송>은 그 기연과 함께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시이다. 화엄사의 진진응 강백이 경허를 위하여 술을 대접하며 “대선지식이신 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술을 드십니까?” 묻자 경허가 답한 것이 바로 이것으로 전문(일지 번역)은 이렇다:

몰록 깨달음은 비록 부처와 같지만
수없는 생에 익힌 습기는 살아 있어
바람은 잠잠하나 오히려 파도는 솟구치고
이치는 분명하나 생각은 엄습하네

頓悟雖同佛 多生習氣生
風靜波尙湧 理顯念猶侵

선어록을 제법 읽어본 나도 “환채”라는 말을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환채의 실상을 접하고 보니 선지식의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옷이 헤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 먹세”라는 뼛골 사무치는 가난을 지복으로 삼고 삼수갑산으로 떠난 경허는, 절을 떠나 유발의 선객으로 추운 고원지대를 떠도는 동안, “강주땅 팔 년 간을 누더기 한벌로 살았다”(276). 이것이 경허의 환채였던가? 이처럼, 경허의 영광과 비극을 오늘날의 언어로 복원하려는 일지스님의 노력은, 새삼 불교의 고준한 가르침을 돌아보게 만든다.


경허는 북방고원을 떠도는 중에 두보의 비감이 어려 있는 <小寒食舟中作>을 썼다. 만공은 스승의 이 친필을 입수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春水船如天上坐 老年花似霧中看/ 娟娟戱蝶過閑幔 片片輕鷗下急湍/ 雲白山靑萬餘里.” 번역하자면 이렇다: “봄물을 타고 흐르는 배는 천상의 자리와 같아/ 노년에 보는 꽃은 안개 속에서 보이는 듯하고/ 곱게 곱게 나비 노닐며 한적한 장막 지나더니/ 하나 하나 갈매기 가벼이 여울을 내려가더라/ 흰 구름 푸른 산은 만여리에 걸쳐 있거늘 . . .

<삼수갑산으로 떠난 부처>는 식상한 제목과는 달리, 사상사적 평전이다. 그리고 이 평전에는 일지스님이 불교에 귀의하여 고투한 수행의 체험이 아련히 배어있다. 간혹 느껴지는 가쁜 숨결이 그가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음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가파르게 경허에게 접근해야 했던 그 뭔가의 이유가 있었겠다고 짐작하고 넘어가야 한다. 과연 그에게 경허는 누구였을까? 경허는 한 시대 불교문화의 총체였다. 그런 위대한 인물 경허의 기행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일지스님의 판단대로, 이류중행異類中行의 경허의 일생은 <선문염송>에 실린 한 게송이 압축하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산하에서는 소가 되고 산상에서는 승僧이 됨이여
항하사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능히 다 부르지 못하네(254)

山下爲牛山上僧 恒沙異號未爲能

산사에서는 우러러 마지않는 선지식이었건만 경허는 산 아래의 다른 부류의 사람들, 다른 존재에 섞여들어가 한 마리 소가 되어버렸다. 대선지식은 선승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일생에 만나기 힘든 사자후를 토하는 금강같은 존재이지만, 시류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에 갇힌 사자, 혹은 한 마리 물소가 되고 만다. 조주스님의 말대로, “삼십 년을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했으나 한 마리 나귀에게 채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이류중행을 선택한 경허의 변신과 기행은 참으로 헤아리기 힘들어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한 이름들을 갖다붙혀도 능히 다 부를 수가 없다. 그러니 경허를 둘러싼 수십, 수백, 수천의 소문과 해석으로도 경허를 이루 다 드러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일지스님의 경허평전은 이처럼 불교사상의 망망한 대해 위에 경허의 일생을 띄워놓고 경허선의 험준한 기봉을 조명한다. 그리고는 <경허집>에 실린 경허의 노래와 시들이 어떤 기연에서 비롯한 것인가를 성실히 조사하고, 또 어떤 심정에서 읊은 것인가를 수행자의 안목으로 감파하여, 요소요소에 그 싯구들을 배치하여 소개한 솜씨는 감탄할 만하다. 그의 번역문 또한 먼저 접한 <전심법요>나 <중관불교와 유식불교>에서 이미 확인한 바이지만,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핵심을 간파한 유려한 문장들이다.

이 뛰어난 실력, 이 뛰어난 안목의 스님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새로운 인물의 발견에 흥분했다. 그런데, 왜 2001년에 펴낸 이 책을 끝으로 더 이상 저술을 하지 않는가? 어느 산중암자에 홀로 들어가 목숨을 내놓고 정진하는 중에 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 원숙한 나이는 아닌 듯하므로. 나는 궁금하여 자료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교계 신문에 2002년 세수 44세로 입적하셨다는 단신이 실려 있었다. 너무나 때이른 죽음이었다. 어지간한 아픔이나 슬픔은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나인데도 그날은 하루종일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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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이태준 고택, 간송미술관, 최순우옛집 등은 성북동 일대를 답사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답사지들이다. 그러나 이재준가는 어느 교회의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어 답사가 곤란하며 성낙원 역시 개인 소유여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재준가나 성낙원에서는 흠모할 만한 정신성을 발견할 수 없어 그곳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데, 노시산방을 답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 집이다. 거의 모든 답사 안내글은 이제는 노시산방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노시산방이 성북동이 개발되는 와중에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김병종의 «화첩기행»(효형출판 2005)을 읽는 중에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2권 184면) 아니, 노시산방이 . . . !

김병종의 글에 따르면, 방문 당시의 집 주인은 "자애로운 노년의 여인"이며 노시산방의 옛 내력을 알고 있는 듯 화초를 걷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두었다고 한다. 노시산방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나무 역시 그대로 남아 김병종을 맞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시산방의 주소를 밝히지 않고 그저 성북동이라고만 했다. 김병종은 서세옥의 제자이고 서세옥은 김용준의 제자이니, 김병종은 김용준의 고제高弟가 된다. 김병종이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를 통해 "육친의 체취"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을 자주 방문하여 그 위치를 알고 있었던 서세옥이 김병종에게 노시산방의 위치를 가르켜줬던 모양이다. 서세옥은 노시산방을 이렇게 회고한다: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 12면

말인즉 노들바위가 있을 정도로 너른 성북천(현재는 복개천으로 성북동 큰길) 가에 노시산방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밖에 노시산방을 비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근원수필»을 비롯하여 이태준 및 기타 인사들의 글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이들 모두 노시산방이 성북천 상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노시산방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먼저, 열화당에서 펴낸 근원전집 보유판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을 보면 근원의 연보가 실려 있는데, 노시산방의 주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44 | 41세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枾山房,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당시 성북동은 경성이 아니라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노시산방 주소로 기록된 "성북리 65-2"는 터무니없는 오류이다. 성북동의 경우 현재의 번지수는 일제강점기의 번지수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 주소대로라면 노시산방이 한성대입구역 근처라는 얘기가 된다. 노시산방을 기술한 여러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살펴보니, 김용준의 호적등본에 기재된 본적을 그대로 취한 것이었다. 본적과 주소지는 같은 것이 아닌데, 연보 편집자가 착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리 65-2"는 김용준이 중앙고보에 입학했을 때 통학을 위해 이사한 집이며, 이것이 본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김용준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31세가 되는 1934년이거니와, 후일에 쓴 <노시산방기>에는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내력이 밝혀져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열화당) 116면


근원은 이 노시산방에서 십여년 간 살다가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이사했다. 노시산방을 인수한 김환기는 그곳에다 김향안과 신혼살림을 차리고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은 곧 수향산방이기도 한데, 이 집에 관하여 김향안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44년 결혼, 성북동 32-2,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억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1948년 성북동 집이 가족이 살기에 협소하기도 했지만 서울에 오면 도시에 살 줄 알았는데 왜 시골에 사느냐고 어머님이 불평하셔서 시내에 집을 찾은 것이 원서동 골목 조금 들어서면 비원이 내려다 보이는 이층 양옥에 이사오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온 가족이 열병으로 신음하고 다시 시외로 나가자는 제의에 어머니도 찬성하셔서 아래 성북동 274-1로 이사하다. 이 집은 어느 분이 제법 격식 찾아 정성들여 지은 전형적 입구(口) 형의 한옥. 시원스럽게 석가래가 건너간 육간대청 뒷문을 열면 뒷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채와 격리해서 쬐끄만 안마당도 있었으나 사랑채를 허물어서 화실을 만들자고 했다.

—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57면, 158면

김향안의 기록대로라면 노시산방은 성북동 32-2가 되어야 맞다. 그러나 성북동 32번지는 선잠단지 인근으로 노시산방을 묘사한 다른 기록들의 위치와 맞지 않다. 오히려 1948년에 이사했다는 성북동 274-1이 다른 기록들이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또한 "아래 성북동 274-1"은 그릇된 서술이다. 성북동 274-1은 위쪽 성북동에 해당하지 "아래 성북동"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만난 기록이 바로 김향안의 또 다른 글이었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 16면

아하! 김향안의 기억으로는 성북동 32-2와 성북동 274-1이 헛갈렸나 보다. 아니면 성북동 274-1의 위치와 대체로 교차하는 성북동 산32-2를 착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동 274-1을 노시산방의 위치로 비정하면, 노시산방을 추적할 수 있는 관련 자료들의 묘사와 거의 대부분이 일치한다. 예컨대 이태준이 자신의 소설에서 까메오로 출현시킨 어느 화가의 집이라든가, 김용준이 <서울사람 시골사람>, <겨울달밤 성북동>에서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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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무들과 까치 집과 싸리 울타리와 괴석과 흰 눈과 그리고 따스한 햇볕.
이것들이 노시사老枾舍의 겨울을 장식해 주는 내 유일한 벗들이다."(김용준, <冬日에 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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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성북동 274-1로 추정되는 노시산방을 답사하였다. 그곳은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에서 조금 올라간 길에 있으며 심우장 건너편에 있는 집으로, 근래에 지은 수월암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온통 수목에 가려 있어서 밖에서는 그 집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노시산방기>를 보면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는 두 그루의 감나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기고 그려준 <수향산방 전경>에는 그가 사랑했던 늙은 감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그 위치에 감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나무 몇 그루" 중 가장 늙어 반이나마 고목이 되었던 감나무는 김향안이 땔나무로 쓰기 위하여 베어내었으며, 괴석은 서세옥이 스승을 추억하기 위한 증표로 자신의 집에 옮겨놓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노시산방(성북동 274-1) 건너편에는 심우장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이태준 고택이 있다. 노시산방을 방문했던 김병종은 때마침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노시산방 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 한용운의 고거인 '심우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 이태준의 고가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는 청룡암, 미륵당, 심우장, 노시산방을 아우르는 정신적 공간이 마침내 복원될 수 있었다. 그 일단은 "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 연꽃이 피어나 — 심우장 배관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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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휘대에 처음 나타나던 바로 그 순간 빈을 정복했다. 청중에 대한 그의 지배는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았다."(64) — 브루노 발터가 빈 오페라단의 지휘대에 오른 구스타프 말러를 두고 평한 말이다.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독재적이었던 지휘자 말러가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빈의 청중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작곡가의 "작품을 완벽하고 명료하고 남김없이 드러내는 공연"(131)을 위해 악단에게 "절대적인 엄밀성"을 요구했으며, "악보에 대해 광적으로 충실"(126)했다. 그래서 "그의 연주에서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인 수정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129)



"구스타프 말러,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해석의 명료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명료함은 한낮의 이성적인 명료함이 아니라, 어둠 속의 파도소리를 맑고 뚜렷하게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들을 수 있는 명료함이다.

말러의 탁월한 해석을 지배하는 것은 '명료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과 같은 명료함은 아닙니다. 음악은 한낮의 예술은 아니지요. 그늘 없는 영혼에게는 음악이 비밀스런 뿌리나 궁극적인 깊이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어둠 속에서 이해되고 느껴져야 합니다. 그것은 지중해의 청량한 푸른색이 아니라 대양의 어둠침침한 한숨 소리를 닮았습니다. 말러의 영혼에는 어둠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밤에 익숙해져 있으며 음악의 깊이를 인식하기 위해 태어난 눈입니다.(129-130)

어느 작곡가의 작품을 통하여 대양처럼 망망한 어둠이 파도치는 소리, 그 장면, 그것을 명료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지휘자는 그 작곡가의 악보나 지시사항에 최대한 복종하는 가운데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말러에게는 특히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악보가 신성불가침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두 작곡가의 내면을 명료하게 파악했던 것일까? 과연 말러의 음악에는 모차르트적인 아름다움과 바그너적인 고통,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13)이 혼재해 있다. 거장들의 내면을 이해했다는 것은 관습적인 수준의 감정들, 의지들, 신앙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높은 위치에서는 격렬한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들마저 극히 섬세하게 장악할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Symphonia Domestica)의 공연이 기억납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격렬한 폭풍우와 그런 폭풍의 고삐를 풀어놓은 지휘자의 고요한 자세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으스스할 정도였습니다.(132)

감정의 극한, 의지의 극한, 아름다움의 극한, 고통의 극한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죽음이 여타의 감정과 여타의 의지와 여타의 아름다움을 단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최대치의 감정, 최대치의 의지, 최대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최대치의 자리에서 창조성이 나타난다. "거장들의 작품이 영원성을 가지는 이유는 거기 들어 있는 창조적 힘과 감정의 깊이와 또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때문"(177)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는 죽음 이외의 모든 것이 모두 피상적이므로, 그 죽음을 정면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이 드러나야 한다. 물론 앤디 워홀처럼 피상성을 인간 삶의 본질로 규정하는 예술가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들은 창조성을 위해 피상성을 최대치로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 인간의 도덕, 인간의 제도, 인간의 종교마저 피상성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는 그래서 피상성의 끝인 죽음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도 "죽음의 영상은 저한테는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1787.4.4,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라고 했다. 이 죽음은 예술적 창조를 위한 죽음, 곧 나라는 존재의 죽음, 새로운 나의 탄생이다.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탄생은 작품을 해석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그는 열정적인 연주에 몰두하여 자기를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넘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들어가며, 그런 상태에서 가장 강렬한 의미를 얻습니다. 그와 같은 황홀경 속에서 느슨해진 개인적 속박을 초월하며 타자의 재현이 공동의 창작, 거의 '나'의 창작이 됩니다. [...] '타자'가 흘러넘치는 마음과 상상력은 일종의 혼연일체를 만들어냅니다. 창조자와 재현자 사이에 놓인 장벽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지휘자는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말러는 설사 공감이 가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작곡가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131)

이렇듯, 브루노 발터가 "말러 사망 25주년 기념일을 맞아" 말러를 회상하며 "감정이 한껏 북받쳐 오른 채 써내려간"(13)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마티 2005, 김병화 옮김)은 천재에 대한 천재의 보고서, 브루노 발터가 그린 말러의 초상이다. 말러는 발터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며, 발터는 말러로부터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짧은 글에서 그 어떤 학자의 책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술, 예술가, 창작, 연주, 해석 등에 관한 무수한 영감을.

그러나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는 달리 온화한 지휘자였고 종교적인 가르침에 충실했다. 브루노 발터가 "여러 해 뒤, 내 영혼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거치면서 그[말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시기"(34)는 바로 그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에 일생동안 충실했던 듯한 발터는 그 성향상 감정이라는 요소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인 가르침은 거의 예외없이, 니체의 표현을 빌면,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과 감정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음악에 들어 있는 감정이라는 요소와 극적이고 시적인 표현의 측면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절대적인 정확성을 희생하더라도 한 작품의 정신적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는 태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더욱 유익했습니다. 즉 작품의 전체적인 활력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정확성을 희생시키려는 성향이 내게 있었던 것이지요.(35-36)

바로 이것이 내가 이십대 시절부터 삼십대 전반까지 그토록 브루노 발터에 열광했으면서도 이제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된 원인일 것이다. 브루노 발터의 지휘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그의 해석은 인간들의 황혼처럼 아름답지만, 지금의 나는 그 온화하게 채색된 황혼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나 말러의 음악은, 브루노 발터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언급하면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음악이다. 이 작품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영웅적이고 충일하고 불꽃같고, 엄숙하고 부드럽게 감정의 모든 범위를 망라하고 있지만 '오로지' 음악일 뿐"(167)이다. 혹은 말러 자신의 말처럼, "이 교향곡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비극적이고 엄숙하며 인간의 모든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단지 음악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교향곡 5번에 대한 해설은 이채훈의 "말러 교향곡 5번에 나의 삶을 투영한다"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교향곡 5번을 두고 "싸늘한 오후의 햇살"이라고 평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감각이다.)

위와 같은 말러 교향곡 5번에 대한 서술은 다른 거장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거장들의 작품은 거장들의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며, 거장들의 내면은 관습적인 감정이나 도덕이나 형이상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대한 작품은 관습적인 감정들과 도덕적인 가르침들의 뿌리를 건드리며, 사람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을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석자의 정신세계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이 우위에 서면 위대한 작품은 필연적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채색되고 만다. 온화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가들의 해석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해석 논쟁은 다름아닌 서로 상이한 정신성 간의 피할 수 없는 싸움, 명운을 건 싸움이다. 해석의 마당에서도 이러할진대, 작품의 창조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차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함부르크 시절 말러의 작업실에는 티치아노(혹은 조르조네)의 <콘체르토> 복제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돌린 수도사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의 수도사는 흡사 "나는 이 공간의 사람이 아니다", "이 음악은 이 시간, 이 시대의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옷을 걸친 남자와 여자가 있다. 비올라를 든 남자(음악가? 진정한 음악가는 그가 아니다)는 마치 권력자처럼 수도사를 제어하려는 자세이다. 여자는 감상자에게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감상자를 꿰뚫어봄으로써 그 욕망에 불과한 아름다움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수도사는 (감상자, 여타 음악가들을 포함한) 인간들의 온갖 감정과 욕망과 권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그것들의 뿌리를 확인한 음악가이다. 이 수도사, 이 진정한 음악가는 멀리 내다보고 "나의 시대는 앞으로 올 것이다"(14)라고 누누히 말했던 말러이며, 욕망과 권력의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이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려면 예술가는 이 아우성 위에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음악일 뿐"이라고 말하는 말러 자신이다. 이런 말러를 위해서는 고전주의의 전아한 세계와 낭만주의의 무한한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말러 작품의 근본은 그가 진정한 음악가라는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천성적으로 낭만주의자였습니다. <탄식의 노래>와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보십시오. 그러나 후반의 발전과정을 보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적 요소 사이의 갈등 및 혼합이 나타납니다.

고전주의적 요소란 그에게서 솟구쳐 나온 음악에게 형식을 부여하고 그의 웅건한 힘과 상상력과 감수성을 통제하고 통달하려는 결단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낭만적 요소란 과감하고 제약 없는 상상력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즉 그의 '야행적' 성격, 표현의 과잉으로 치달아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이거나 그 밖의 다른 이념들을 그의 음악적 상상력 속으로 뒤섞어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상상력은 소용돌이 같은 음악의 내면세계이며 감동 넘치는 박애주의이며, 시적인 상상력과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감정이었습니다.(136-137)

"감동적인 박애주의"와 "종교적인 감정", 이 두 마디에서 브루노 발터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종교적인 감정을 여타 감정들이 소멸할 때 다가오는 신비한 감정으로 보는 것은 탁월한 해석이지만, 그것을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비롯한 감정과 동일시하게 되면 거장의 작품은 온화한 색채를 입고 타락하게 된다. 말러는 에누리없이 첫번째 해석의 지지자였을텐데, 브루노 발터는 어느 쪽이었을까? 그는 두 해석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사랑에도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고 죽음에도 여러 종류의 죽음이 있다. 우리는 섣불리 우리의 사랑과 죽음을 거장들의 그것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사랑과 죽음은 "천상과 지옥"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영역 밖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천상과 지옥에 존경을 표해야 마땅하다. 그들에겐 천상도 아름답고 지옥도 아름답다.

말러는 1896년에 한 음악잡지의 편집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지 꽃과 새, 숲의 향기 등을 염두에 두는 것은 제가 보기에 좀 이상합니다. 위대한 디오니소스, 판 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203)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part 1),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2004.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part 2),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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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그림자 - 니체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6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조창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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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독자들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니체 애독자인 나로서는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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