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이태준 고택, 간송미술관, 최순우옛집 등은 성북동 일대를 답사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답사지들이다. 그러나 이재준가는 어느 교회의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어 답사가 곤란하며 성낙원 역시 개인 소유여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재준가나 성낙원에서는 흠모할 만한 정신성을 발견할 수 없어 그곳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데, 노시산방을 답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 집이다. 거의 모든 답사 안내글은 이제는 노시산방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노시산방이 성북동이 개발되는 와중에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김병종의 «화첩기행»(효형출판 2005)을 읽는 중에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2권 184면) 아니, 노시산방이 . . . !

김병종의 글에 따르면, 방문 당시의 집 주인은 "자애로운 노년의 여인"이며 노시산방의 옛 내력을 알고 있는 듯 화초를 걷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두었다고 한다. 노시산방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나무 역시 그대로 남아 김병종을 맞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시산방의 주소를 밝히지 않고 그저 성북동이라고만 했다. 김병종은 서세옥의 제자이고 서세옥은 김용준의 제자이니, 김병종은 김용준의 고제高弟가 된다. 김병종이 김용준의 «근원수필»과 «조선미술대요»를 통해 "육친의 체취"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을 자주 방문하여 그 위치를 알고 있었던 서세옥이 김병종에게 노시산방의 위치를 가르켜줬던 모양이다. 서세옥은 노시산방을 이렇게 회고한다: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 12면

말인즉 노들바위가 있을 정도로 너른 성북천(현재는 복개천으로 성북동 큰길) 가에 노시산방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밖에 노시산방을 비정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근원수필»을 비롯하여 이태준 및 기타 인사들의 글 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이들 모두 노시산방이 성북천 상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나는 노시산방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먼저, 열화당에서 펴낸 근원전집 보유판 «근원전집 이후의 근원»을 보면 근원의 연보가 실려 있는데, 노시산방의 주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44 | 41세
성북동 자택 '노시산방(老枾山房,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을 김환기에게 넘겨주고 경기도 양주군 의정부읍 가능리 고든골로 이주, 그곳의 집을 '반야초당(半野草堂)'이라 이름짓고 살았다.

당시 성북동은 경성이 아니라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노시산방 주소로 기록된 "성북리 65-2"는 터무니없는 오류이다. 성북동의 경우 현재의 번지수는 일제강점기의 번지수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 주소대로라면 노시산방이 한성대입구역 근처라는 얘기가 된다. 노시산방을 기술한 여러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살펴보니, 김용준의 호적등본에 기재된 본적을 그대로 취한 것이었다. 본적과 주소지는 같은 것이 아닌데, 연보 편집자가 착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리 65-2"는 김용준이 중앙고보에 입학했을 때 통학을 위해 이사한 집이며, 이것이 본적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김용준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31세가 되는 1934년이거니와, 후일에 쓴 <노시산방기>에는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내력이 밝혀져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열화당) 116면


근원은 이 노시산방에서 십여년 간 살다가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이사했다. 노시산방을 인수한 김환기는 그곳에다 김향안과 신혼살림을 차리고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은 곧 수향산방이기도 한데, 이 집에 관하여 김향안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44년 결혼, 성북동 32-2,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억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1948년 성북동 집이 가족이 살기에 협소하기도 했지만 서울에 오면 도시에 살 줄 알았는데 왜 시골에 사느냐고 어머님이 불평하셔서 시내에 집을 찾은 것이 원서동 골목 조금 들어서면 비원이 내려다 보이는 이층 양옥에 이사오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온 가족이 열병으로 신음하고 다시 시외로 나가자는 제의에 어머니도 찬성하셔서 아래 성북동 274-1로 이사하다. 이 집은 어느 분이 제법 격식 찾아 정성들여 지은 전형적 입구(口) 형의 한옥. 시원스럽게 석가래가 건너간 육간대청 뒷문을 열면 뒷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채와 격리해서 쬐끄만 안마당도 있었으나 사랑채를 허물어서 화실을 만들자고 했다.

—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57면, 158면

김향안의 기록대로라면 노시산방은 성북동 32-2가 되어야 맞다. 그러나 성북동 32번지는 선잠단지 인근으로 노시산방을 묘사한 다른 기록들의 위치와 맞지 않다. 오히려 1948년에 이사했다는 성북동 274-1이 다른 기록들이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또한 "아래 성북동 274-1"은 그릇된 서술이다. 성북동 274-1은 위쪽 성북동에 해당하지 "아래 성북동"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만난 기록이 바로 김향안의 또 다른 글이었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 16면

아하! 김향안의 기억으로는 성북동 32-2와 성북동 274-1이 헛갈렸나 보다. 아니면 성북동 274-1의 위치와 대체로 교차하는 성북동 산32-2를 착각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성북동 274-1을 노시산방의 위치로 비정하면, 노시산방을 추적할 수 있는 관련 자료들의 묘사와 거의 대부분이 일치한다. 예컨대 이태준이 자신의 소설에서 까메오로 출현시킨 어느 화가의 집이라든가, 김용준이 <서울사람 시골사람>, <겨울달밤 성북동>에서 묘사한 노시산방의 위치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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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나무들과 까치 집과 싸리 울타리와 괴석과 흰 눈과 그리고 따스한 햇볕.
이것들이 노시사老枾舍의 겨울을 장식해 주는 내 유일한 벗들이다."(김용준, <冬日에 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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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성북동 274-1로 추정되는 노시산방을 답사하였다. 그곳은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에서 조금 올라간 길에 있으며 심우장 건너편에 있는 집으로, 근래에 지은 수월암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온통 수목에 가려 있어서 밖에서는 그 집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노시산방기>를 보면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는 두 그루의 감나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기고 그려준 <수향산방 전경>에는 그가 사랑했던 늙은 감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그 위치에 감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나무 몇 그루" 중 가장 늙어 반이나마 고목이 되었던 감나무는 김향안이 땔나무로 쓰기 위하여 베어내었으며, 괴석은 서세옥이 스승을 추억하기 위한 증표로 자신의 집에 옮겨놓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노시산방(성북동 274-1) 건너편에는 심우장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이태준 고택이 있다. 노시산방을 방문했던 김병종은 때마침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노시산방 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 한용운의 고거인 '심우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 이태준의 고가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는 청룡암, 미륵당, 심우장, 노시산방을 아우르는 정신적 공간이 마침내 복원될 수 있었다. 그 일단은 "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 연꽃이 피어나 — 심우장 배관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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