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할 때 독일관념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그 번역용어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관념”, “객관”, “인식”, “본질”, “오성”, “이성”, “지성”, “현상”, “경험”, “감각”, “감관”, “의미”, “근거”, “인과” 등등의 낱말들은 길게 역사를 추적하면, 일본 번역어를 거슬러올라가 독일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릴 때 우리의 개념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은 그 체계와 분리된 의미를 띠기 어렵다. 다름아닌 일본 번역어가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에 맞게 번역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라는 저수지로 흘러든 뒤 이후의 철학사를 향해 흘렀다는 칸트주의자들의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겠으나, 적어도 그 용어들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그만큼 우리는 그 용어들을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틀은 엄밀히 말해 한 시대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 용어들의 역사성을 밝혀내면서 개념틀을 뿌리채 흔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라이프니츠-볼프 이래의 개념체계, 즉 몇 세기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주조했던 개념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현대독일어 문법에 허용되지 않는 희한한 독일어를 남발하는 것은 독일철학 용어로 편입된 언어들을 옛 시대의 의미로 복원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라이프니츠-볼프보다 약 400년 앞선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논고에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독일어가 등장하지만,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개념틀 내지 독일관념론의 개념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 때문이다. 바꿔 말해, 에크하르트의 글에 등장하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낱말들은 강단철학에서 협소한 개념체계로 굳어지기 이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다 그의 중세고지독일어(Mittelhochdeutsch)는 현대독일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언어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령, “ein lebende wesende istige vernünftigkeit”(이부현은 “살아 있고 본질적이고 존재하는 이성”으로 옮겼다)에서 “wesend istig”(본질적이고 존재하는)라는 낱말들은 현대독일어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형으로부터 “Wesen”(본질)이라는 명사의 동사가 있었으며, “Sein”(존재)이라는 명사 내지 동사의 형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본질하다”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법상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이라는 번역어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협소한 개념에만 적합할 뿐, 그 이전의 언어세계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경우 현대독일어에 남아 있는 “abwesend”(결석하다), “anwesend”(참석하다)라는 분사형을 함께 거론하며 “Wesen”이 원래 동사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본질” 대신에 “임재하다”, “임하다”, “출석하다” 등의 의미로 개념을 복원시킨다. 이렇듯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로 회귀하게 되면, 독일관념론같은 개념체계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체계는 한갓 협소한 시대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독일어의 본래 의미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 이래 형성된 개념틀을 깡그리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거의 모두 잊고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따라서 본래적인 이해로 보면 신은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성이거나 인식이므로, 그러니까 다른 어떤 존재도 섞이지 않은 순수 인식이므로, 그 유일무이한 신이 자신의 인식을 통하여 사물들을 존재 속으로 호출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신 안에서만 존재는 인식이므로. . .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신의 온 존재는 인식 자체이므로 신은 순수 지성이라는 점이다.

Es ergibt sich also offentlich, daß Gott im eigentlichen Verstande einzig ist. Und da er Intellekt oder Erkennen ist, und zwar reines Erkennen ohne Beimischung irgendeines andern Seins, so ruft dieser einzige Gott durch sein Erkennen die Dinge ins Sein, eben weil in ihm allein das Sein Erkennen ist . . . Er wollte und lehren, daß Gott reiner Intellkt sei, dessen ganzes Sein das Erkennen selbst ist.

— Josef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24면

위 인용문에서 “신은 지성”, “신은 인식”, “신은 순수 인식”, “신의 존재는 인식 자체”, “신은 순수 지성” 등의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틀로 파악한다면 십중팔구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중층적 몰이해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중층적인 몰이해를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의 독자들을 위해서, 물론 그런 독자들은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각 용어들에 대하여 엄밀히 번역해야 한다. 가령 우리말의 자연스런 가독성을 위해 “Intellekt”, “Vernunft” 등을 일괄적으로 “이성”으로 번역한다거나, “Vernunft”의 번역어로 “지성”이나 “이성”을 번갈아 채택한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부현의 번역은 이런 착오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착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의 일관되지 못한 번역어 채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이부현의 번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개념들, 즉 “순수 인식”, “인식 자체”, “순수 지성”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그 개념들의 변천사를 면밀히 검토한다하여 그 의미가 포착될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자신이 그 개념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미를 모두 털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에크하르트의 직접 경험을 시사하는 암시의 언어일 뿐, 사상 체계를 확립하거나 분석하는 치밀한 논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역시 경험이다. 성실한 책읽기와 분석을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 반면, 고도의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언어도 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바로 후자의 언어이다. 남녀의 감정놀음인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판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를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신비가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언어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혀 사용한다. 그는 당대의 언어는 물론 당대의 사상적 체계조차도 자신의 경험 뒤에 따라오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가벼운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그 언어는 극한에 이른다. 바로 이 의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나 비유가 어느 사상체계나 어느 감각세계 내에서 그 구조에 맞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에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법들, 모든 표현들, 모든 사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구조 자체가 이미지요 비유가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영원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 언어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의 심리를 폭로하는 실마리, 즉 일종의 비유나 이미지 같은 것, 심리학적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현실은 (혹은 현실이라고 믿는 그 무엇은, 혹은 철학자들이 몸담은 사상체계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또 다른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와 실제, 비유와 사실 간의 복합적 관계가 혁신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나 비유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에 가깝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미지나 심리의 연상을 따라가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은 그림자 놀이이므로), 사상서들을 읽을 때는 추론이나 논변, 논리를 따라가면 그 귀결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 역시 그림자 놀이이므로), 신비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면 필연적으로 그림자에 속아넘어가 좌초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림자 놀이가 아니라 그림자 바로 그것일 뿐이므로).

가면은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는 것만 알릴 뿐, 얼굴을 묘파하지 않는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폐되지 않은 진리, 즉 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도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설교 32

그의 강론,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긴밀히 연계되는 그림자 놀이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찰나찰나 흔들리는 그림자, 찰나찰나 명멸하는 그림자, 순수한 그림자다. 진리를 가장 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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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게르하르트 베어 지음, 이부현 옮김 / 안티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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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시절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루가복음 10장 38절 한 구절에 대한 설교였는데, 에크하르트는 그 설교에서 라틴어 성서구절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하여 소개한다. 라틴어 성서 원문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번역문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한 성읍으로 올라가시니 마르타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그분을 집에 영접했다(Intravit Jesus in quoddam castellum et mulier quaedam, Martha nomine, excepit illum in domun suam).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작은 성읍으로 올라가시니 부인인 한 처녀가 영접했다(Unser Herr Jesus Christus ging hinauf in ein Burgstädtchen und ward empfangen von einer Jungfrau, die ein Weib war).

“예수”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옮긴 것이나 “성읍”을 “작은 성읍”으로 옮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여인”을 “부인인 처녀”로 옮긴 것은 원문을 자유롭게 첨삭한 것인지라 사실 용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번역했고, 이후의 설교 내용은 번역상의 문제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가령 “예수를 영접할 사람은 처녀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처녀가 되어야 한다”, “처녀는 부인이다, 처녀는 자유롭고 자아구속이 없어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처녀는 하느님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그 자신 가까이에 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양태나 속성이 없는 순일무잡한 하나이므르, 이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버지도 아니며 아들도 아니며 성령도 아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그 어떤 것이다. 보라, 하느님은 순일무잡하시므로 그 하나 안으로, 내가 영혼 안의 작은 성이라고 부른 그 하나 안으로 들어오시며, 그외 어떤 방식으로도 들어오시지 않는다.” 등등, 그의 설교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런 해석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해석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도대체 이런 말들은 무슨 의미인가? 에크하르트는 청중의 이런 의구심을 예상했다는 듯, “여러분이 제 마음을 가지고 인식하기라도 한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이며, 진리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은 참이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증인으로 세우고, 제 영혼을 보증으로 세운다”라는 유의 말을 종종 곁들인다.
 

책을 매우 적게 소장하고 있는 나의 서재에 에크하르트 관련 책들이 꽤 있는 것도 아마 그때에 접한 에크하르트의 파격과 과격함이 내 영혼을 깊이 흔들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조금 성장하고서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니, 그의 설교는 알레고리 해석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크하르트는 성서의 텍스트 자체를 인간 영혼의 움직임을 묘파한 거대한 알레고리 텍스트로 보는 셈이다. 그래서 성서의 텍스트는 한껏 자유롭게 해석된다. 텍스트가 전면적으로 흔들리면서 전대미문의 심오한 해석이 탄생하게 된다. 뭘 모르던 시절엔 알레고리 해석만큼 주관적이고 억지스런 해석도 없다고 보았는데, 이제는 알레고리 해석만큼 경이로운 해석도 달리 없다. 다만 성서의 텍스트를 전면적으로 흔들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안목이 있는 수준, 즉 에크하르트 정도의 수준에 이른 인물의 알레고리 해석일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오리게네스 수준의 알레고리 해석은 그에 비할 바 아니다.

내가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처음 접한 것은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글들을 모아놓은 «Deutsche Mystik(독일 신비주의)»라는 독일책에서였다. 그 당시 국내에는 군소 출판사에서 나온 에크하르트의 설교집도 있었던 듯한데, 영어에서 중역한 것인데다가 번역도 신통치 않아 독일어로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을 맛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엑크하르트와 禪»(강영계 역)도 번역되어 있었지만, 에크하르트의 활력과 기세, 파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 몹시 평이하고 지루한 서술에 불과했다. 십분 동의할 수 있는 길희성의 평가를 빌려 말하자면, “그의 엑카르트 이해는 극히 초보적이고 피상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데도 서양학자들에게 스즈키가 제법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의 선불교에 대한 이해 내지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초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파격과 과격, 심오함 탓인지 국내에서의 그에 대한 소개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것이 길희성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2003)이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함께 연구하는 저자의 이력상 에크하르트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의외로 그는 매우 늦게 에크하르트를 접한 듯하다. 언급한 책의 머리말에서 길희성의 한탄을 한 번 들어보자:

특히 동서양 사상의 대화, 그 가운데서도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두 위대한 종교 전통의 창조적 만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엑카르트와의 만남은 실로 하느님의 “계시”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격적 경험이었다. 엑카르트의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나는 참된 인간성의 실현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동양 사상과의 완벽한 일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공부한답시고 관심을 가진지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나는 엑카르트 사상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서양 중세철학을 소홀히 해 온 나의 무지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라틴어 공부도 좀 더 착실히 해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도 많이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너무 늦게 엑카르트라는 사상의 보고를 만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랬던 만큼 그는 에크하르트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그의 저작은 동서양 사상을 넘나들면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한 뛰어난 학술서이다. 특히 에크하르트 사상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 “초탈과 돌파”, “하느님 아들의 탄생”에 대한 심도 있는 소개가 눈에 띈다. 그러나 학자는 역시 학자이므로, 다른 학자들을 상대하느라 수많은 면수를 할애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가능한 한 많이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어 학자들의 해석이 가해지지 않은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비교적 많이 접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에크하르트에 대한 연구서보다는 에크하르트 설교의 번역서를 원했다. 어찌 보면, 길희성의 저작은 에크하르트 저작의 번역서나 입문서가 없는 마당에 전문적인 연구서가 등장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올해 만난 책이 바로 게르하르트 베어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부현 역, 안티쿠스 2009)였다. 단적으로 말해, 게르하르트 베어의 안목은 길희성의 안목과 깊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에 대한 입문서의 역할로는 이보다 적절한 것은 없을 듯싶다.

    에크하르트


게르하르트 베어의 저작은 목차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에크하르트의 활동시기를 즈음한 독일 신비주의, 에크하르트의 생애를 먼저 서술하고, 에크하르트의 라틴어 저작들과 독일어 저작들, 그리고 설교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그리고 주제별로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살핀 다음, 수용사와 영향사, 선불교와의 관련성 등을 서술한다. 적은 분량의 저작인데도 제법 알찬 느낌을 주는 것은, 저자가 자신의 관점을 과도하게 투영하지 않고 최대한 사상가들과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비주의 문헌을 앞에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토론과 논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콥 뵈메의 연구자인 에른스트 벤츠는 신비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비평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 영역과 직관 영역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압축되어 있는 총보總譜와 같이 신비주의의 문헌적 증언들을 서로 대립시켜 정렬시킨다. 그들은 이러한 총보에서 단지 개별적인 음색만 힘겹게 해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총보의 건축과 오케스트라 연주는 그들의 파악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 있다. 신비주의로 향하는 논의의 단조로움과 궁색함은 신비주의적 경험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아예 없는 사람들이 여기서 떠들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222-223)

지당한 말이다. 신비주의적 경험이 없는 한 학자들은 총보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 총보에 대해 떠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자 모험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사상을 다루는 학자들은 첫째도 둘째도 불손하지 않아야 한다. 융의 표현을 빌면, 형이상학적 언명을 포기하고 “학문적인 자기 겸손Wissenschaftliche Selbstbescheidung”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게르하르트 베어의 자세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에크하르트 앞에서 최대한 물러서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도 헛다리를 짚는 대목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여러 사상가나 학자들을 두루 평등하게 소개하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저작은, 역사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입문 수준에서 소개하기로 유명한 로로로 시리즈에 속한 것이다. 그런 만큼 독특한 해석이나 주장은 없고 말 그대로 “입문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사상가의 사상이 탄생한 배경이나 전후 영향사에 관한 서술은 매우 유익하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원초적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의 유산 및 비밀 계율과 비의적인 실행 등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23)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를 다시금 각인하게 되었으며, 쿠자누스가 20년 이상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에밀 브루너의 «신비주의와 말씀»이 루돌프 오토의 «서양-동양의 신비주의»와 같은 연구서들에 대한 저항으로 기획되었다는 사실 등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베어의 저작에서 별도의 평가 없이 그저 병렬적으로 인용된 사상가들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은 역시 남다른 사상가라는 생각, 한때 내가 심취한 바 있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은 근본에 있어서 수사에 불과한 철학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은 개신교 특유의 합리적 정신이 낳은 산물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그리고 에리히 프롬, 마르틴 부버, 스즈키 다이세츠 등은 사상가라 하기엔 함량 미달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등을 겸사겸사 가져보게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접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영지주의 전통과 “부정의 길via negativa”로 유명한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의 신비신학을 피해갈 수 없다. 즉, 기독교 전통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전통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험한 시도이겠지만, 개신교 전통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 사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신비주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두 바퀴를 이루며 함께 굴러갔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러한 여러 대립적 요소들을 단순화하여, “영지주의 전통과 기독교 전통 간의 대결” 운운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그건 개신교적 전통만을 아는 이들의 무지한 단순화에 불과하거나 기독교 교조주의자들의 편협한 단순화에 불과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신비적 합일”의 신비주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가톨릭 신비주의의 극점에는 다름아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와 영지주의 간의 대결”이라는 언어 조합이 매우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도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과 영지주의의 전통 간에 친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고착된 기독교 사상을 넘어서 더 폭넓게 바라보자면, 영지주의와 기독교 전통의 대결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고 그 대신에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의 대결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했고, 에크하르트의 사상도 한때 이단으로 단죄받았다. 이 단죄의 역사 위에 성립한 기독교 역사는 영지주의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을 언제라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에크하르트에 대한 국내 소개를 더디게 만든 요소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길희성의 연구 이후 에크하르트에 대한 국내 소개가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2009년 이부현의 등장과 함께 사정이 많이 달라질 듯하다. (그간에 매튜 폭스의 에크하르트 관련 서적도 번역되었지만 나는 저자의 역량에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어 그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역자 이부현의 저작들을 검색을 해보니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 번역서도 게르하르트 베어의 입문서와 함께 출판되었고 향후에는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도 번역될 예정인 듯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논고»가 “독일어 설교와 논고 1”이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번역•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기대가 된다.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와 논고의 번역이야말로 진정한 에크하르트의 소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번역서로 판단해 보건대, 이부현은 번역어 선택에서 몇 가지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다. 가령 ‘버리고 떠나 있음Abgeschiedenheit’, ‘그냥 내맡겨두고 있음Gelassenheit’ 등으로 옮긴 것은, 길희성의 같은 용어에 대한 번역어 ‘초탈超脫’, ‘초연超然’과 비교해 볼 때, 자유로우면서도 이해가 쉽게 되는 편이다. 그의 번역문은 잘 읽히는 편이다. 독일어 특유의 만연체 문장 때문에 아주 간혹 가독성이 떨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띄지만, 그것마저 내게는 저자가 원문에 (특히 에크하르트의 인용문에) 가급적 충실했다는 증거로 읽힌다. 대부분 인명은 교회라틴어 발음으로 옮겨졌으며, 번역어 선택에 있어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다.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와 설교는 중세독일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세독일어를 따로 연구하지 않는 이상 번역하기 힘들지만, 1963년에 출간된 요제프 퀸트Josef Quint의 뛰어나고 쉬운 현대독일어 번역본이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쉬운 독일어라한들 그 심오함 때문에 쉽게 번역될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와 설교가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늦는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런 만큼 나처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 번역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로서는 이부현의 등장이 반갑고 반갑다. 역자의 건강과 성실을 빈다.
 

에크하르트의 설교 형식의 논고 <고귀한 사람>은 루가복음 19장 18절의 “한 고귀한 사람이 한 왕국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는 성서구절에 관한 것이다. 루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에서 상황을 설정하는 별 의미 없는 건조한 서술문인데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이 구절을 특유의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더없이 심오하고 풍부하게 탈바꿈시킨다:

우리가 피조물들을 그들 고유의 본질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저녁인식”이라 불린다. 그 인식으로 우리는 다양한 차별의 상像 속에서 피조물들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피조물들을 신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아침인식”이라 불리며 하나의 “아침인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우리는 온갖 차별 없이 피조물들을 관조하며, 하느님 자신인 그 하나 안에서 온갖 상을 탈락시키고 온갖 동일성을 벗겨낸다. 이것 역시 “고귀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한 고귀한 사람이 떠났다”라고 말씀하신 그 사람. 그는 하나이며, 하느님과 피조물을 하나 안에서 인식하기 때문에 고귀하다. […]

따라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한 고귀한 사람이 한 왕국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고 제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고귀한 인간은 제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를 자신 안에서 그리고 하나 안에서 추구하고 하나 안에서 맞아들여야 한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되돌아왔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고 알고 있다는 점을 알고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

우리의 주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고귀한 영혼을 황무지로 보내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영혼의 마음 속에 말하리라.”(호세아 2, 14)

— Joseph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146-149면

한 고귀한 사람, 에크하르트가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 그의 설교는 떠났다가 되돌아온 위대한 신비가의 지극히 심오한 해석이다. “다양한 차별”은 무엇이며, “온갖 상을 탈락시키고 온갖 동일성을 벗겨낸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설교나 논고에서 이런 의문에 숱하게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혹은 수사법상의 논리로, 혹은 철학적 논변으로 파악될 수는 없는 것들이므로,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다만, 한 고귀한 사람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가 떠났다가 되돌아와서 설교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한때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나 이제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정수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우러르면 될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직 가야할 길, 아직 배워야 할 길이 멀다는 겸허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언젠가는 에크하르트의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말들을 이해할 날이 오게 될 것이므로.

“하나와 함께하는 하나, 하나의 하나, 하나 안의 하나, 하나 안에서 하나가 영원히. 아멘”(Quint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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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평점 :
일시품절


개인적 취향을 말하자면, 낭만주의보다는 계몽주의를 좋아하는 편이고 계몽주의보다는 냉소주의를 좋아하는 편이다. 냉소주의를 멀리하고 낭만주의에 친근했던 학창시절과는 정반대가 된 것은, 이제는 인간 이성이 구축한 진지하고 치밀한 인식체계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불가분 권력과 결탁된 교조주의·도덕주의를 접하노라면 그 농담의 거대함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웃음으로 중력의 영, 무거운 정신을 죽이자고 말했던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예삿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니체의 한기·냉소는 필시 농담·웃음과 연결된 것이리라. 그것은 사심없는 웃음, 증오가 없는 냉소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달라진 것도 이채롭다. 젊은날에는 밤과 어둠을 노래하는 낭만주의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낭만주의의 감정이 부담스럽다. 그 감정이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언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미된 언어, 축축한 언어라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낭만주의의 감정 자체가 과잉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몽주의는? 고증과 실증이 계몽주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는 계몽주의를 좋아하지만, 계몽주의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체계적 논리 때문에 계몽주의가 싫다. 체계적 논리와 축축한 언어는 습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동일한 언어가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냉소주의란 다름아닌 체계적 논리를 구축하지도 않고 축축한 언어를 남발하지도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논리라는 거미줄, 감정이라는 거미줄! 어느 한 감정에 평생을 맡기고 사는 인생이 불쌍하듯, 평생을 논리충동에 맡기고 사는 학자들의 인생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거미줄에 붙들린 인생들이다. 그 거미줄은 한닢 나뭇잎으로 쓱 그으면 없어지고 말 것인데, 거미줄에 한사코 매달린 이들에게는 철옥보다도 더 강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생은 끝없이 거미줄 위에서 회전한다. “그 삶에는 새로운 것도 없고, 네 삶의 모든 고통, 모든 욕망, 모든 생각, 모든 한숨, 이루 말하기 힘든 모든 대소사가 네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동일한 순서와 차례에 따라 모든 것이 — 그리고 나무 틈새로 비치는 바로 이 거미와 달빛, 바로 이 순간과 나 자신까지도. 현존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되풀이하여 회전하리라 —”(즐거운 학문 4,341)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와 그 인물들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대와 그들에 대한 해석들을) 냉소한 저작이다. 오랫만에 취향에 맞는 책을 만났다. 그는 주자학·성리학의 억압적 체계성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그 체계성에 동조하지 못했던 인물들(가령 허균이라든가 박지원 등)에 대한 관념적·이념적 해석도 거리낌없이 비판한다. 사실 관념적·이념적 과잉은 감정적 과잉 못지않게 축축한 언어이며 사태를 오도하는 오염된 언어이다.

요컨대, 강명관은 국가주의·권력체계 내의 인물들을 싫어하며, 국가주의·권력체계에서 비껴난 인물들에 대한 과도한 해석도 싫어한다. 그저 문헌을 통해 성실하게 고증하면서 조선시대의 인물들을 냉소적으로 접근할 뿐이다. 이 때의 냉소라는 것은 인물들 자체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이제까지의 주류·비주류 해석들에 대한 냉소를 말한다. 나는 관념적 해석에 휘둘리지 않는 이런 냉소가 좋다:

   
  나는 천원권 지폐 앞면에 실린 이황에게 존경의 염을 느끼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퇴계보다는 그를 화폐에 안치한 국가주의가 싫다. 한데 그 국가주의를 걷어낸다 해도 퇴계는 여전히 별로다. 퇴계가 생각했던 이상적 인간과 사회가 나의 세계관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퇴계가 민족의 스승일지는 몰라도 나의 스승은 아니다.(86)

율곡이란 천재에 의한 텍스트의 고정과 절대화는 당연히 다른 텍스트들을 배제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이 아닌 타자들은, 이단이 되거나 잡류가 되었다. 이것은 지식과 사유의 폭을 제한하고 자유로운 지식과 사유의 분출을 잡도리하였다. 이단 잡류의 서적은 잠시도 보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적어도 성종 때까지는 학문의 다양성이란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림 정권 이후 그 학문적 다양성은 실종되었다.(109)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허균은 중세를 벗어나려 한 '조숙한 근대인'으로 보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런 허균의 이미지를 믿지 않는다. 아마 허균에 씌워진 '조숙한 근대인'이란 이미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구 근대의 모습을 찾으려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일 것이다. 이제 이 선입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146)

연암의 사유를 꼼꼼히 검토하면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사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어를 빌려오는 것을 표절이라 한다면, 사유의 틀을 통째 빌려오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연암은 독창을 말했지만, 그 독창을 설파하는 사유 자체는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하늘 아래 어디에 새로운 것이 있다던가.(261)

잘라 말해 정조는 근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정조와 근대를 연결하는 그 생각조차 끔찍하다. 정조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책을 좋아하기는 했으되, 지배 이데올로기 곧 주자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유를 담은 책들을 철저히 탄압했던 인물이다. 나에게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다.(263)
 
   


위와 같은 강명관의 평가들은 세간의 평가를 충분히 전복시키고도 남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복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책읽기 끝에 수월하게 이런 결과를 도출해낸 것같다. 사실, 결과의 도출보다는 결과를 도출시키는 고증의 과정이 이 책의 백미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관념적 해석을 싫어하고, 마치 놀이하듯 텍스트를 성실히 고증하면서 읽기를 좋아하는 학자, 한 마디로, 책벌레인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131)는 미암 유희춘에 대한 평은 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강명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책벌레들의 생애와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책이 어떻게 인쇄되고 유통되고 읽혀지고 해석되었던가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권력과 시문詩文이 하나였던 시대였던 만큼 책벌레들의 인생은 곧 권력·반권력의 역사이기도 했다. 권력과 시문이 하나였던 시대였던 만큼 문헌해석은 곧 목숨을 건 권력투쟁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만큼 책의 유통과 해석을 통해서 한 시대의 정신적 면모가 전반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시대는 흔치 않을 것이며, 따라서 성실한 책벌레가 아니라면 그 시대를 제대로 규명하기 힘들 것이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가 책벌레들의 소묘에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 정신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저작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와 조건들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사를 다룬 저작들을 읽을 때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모호하다. 그 저작들이 인물보다는 사상에 역점을 두어 소개하고, 인물 소개를 하더라도 그 내용은 생몰년과 간단한 이력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말·사상으로 환치되어 머리에 각인되기 마련이고, 그들이 어떤 인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늘 모호한 채로 남는다. 과거의 역사를 다룬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그런 점이 아쉬웠다.

관념적·이념적 해석에 치중할수록 인물의 소소한 일상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관념적·이념적 해석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인물의 대소사가 모두 관심거리가 된다. 가령 그가 먹는 것, 노는 것, 구입한 것, 빌린 것, 읽은 것, 베낀 것, 방문한 곳, 교유한 인물, 소소한 목록 등 모든 것이 관심거리가 된다. 자연히 고증에 치밀하게 되고 한 인간으로서의 생존조건을 중시하게 된다.

강명관이 이런 소소한 것들(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들)에 충실한 것은 그가 기존의 관념적·이념적 해석, 아니 관념적·이념적 해석 자체를 가급적 냉소하는 체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대목에서 인물들의 천태만상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도, 그의 냉소와 그의 웃음이 긴밀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굉박宏博한 책벌레들에게 엄숙한 교조주의나 관념적·이념적 해석은 얼마나 우스운 것이냐. 거기에다 강명관처럼 혜안이 번뜩이는 책벌레라면, 조선시대 정신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역할을 십분 감당하고도 남으리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강명관의 붓을 거친 인물들은 모호하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정에 치우쳐 인물을 축축하게 적시거나 관념·이념에 치우쳐 인물을 형해화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인물의 취향과 전략, 습관, 호오를 분명히 드러낸다. 아마 이 점이 내가 강명관을 호평하는 결정적 원인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간 백태를 드러낸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조선시대의 책벌레들이 어떻게 책을 입수하고 어떤 책을 어떻게 소장하고 읽었는가, 국가가 어떤 책을 어떻게 인쇄하고 어떻게 유통시켰는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세세하게 서술한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서술 의도이겠지만, 이 책은 그 의도에 충분히 부합하면서 그 의도를 훨씬 상회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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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5-31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류의 책이라서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반조 2009-06-0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펠릭스 2009-06-1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성실한 책읽기'란 말이 저에게 들어옵니다.

반조 2009-06-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펠릭스 2009-06-2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와 같은 강명관의 평가들은 세간의 평가를 충분히 전복시키고도 남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전복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책읽기 끝에 수월하게 이런 결과를 도출해낸 것같다. 사실, 결과의 도출보다는 결과를 도출시키는 고증의 과정이 이 책의 백미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관념적 해석을 싫어하고, 마치 놀이하듯 텍스트를 성실히 고증하면서 읽기를 좋아하는 학자, 한 마디로, 책벌레인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책을 좋아하여 음악이나 여색에 빠진 것과 같았다”(131)는 미암 유희춘에 대한 평은 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이 절을 다시 읽었읍니다.
 

경허는 1912년 4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채로 북방의 고원에서 입적한다. 일년 뒤 이 소식이 수덕사의 제자들에게 알려지고 혜월과 만공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였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각 선원은 5원, 각 개인은 50전 이상씩 연조금을 모아 인쇄한 것이다. 이것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鏡虛集»으로 당시 비매품으로 배포되었다.



1942년 비매품으로 간행된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 표지와 이 판본에 수록된 경허선사초상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歌의 일부만 한글일 뿐 나머지는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서문부터 시작하여 한적본의 면수로 60면, 즉 오늘날의 면수로 120면에 이른다. 이 «경허집»은 1970년에 «경허당법어록»(대동불교연구원 1970)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허집»은 번역되지 않았다.

«경허집»이 처음 번역된 것은 1981년이다. 수덕사 문중의 원담스님은 «경허집»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증보하기 위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를 답사하여 법어 및 <금강산유산가>를 비롯한 선시 40여 수를 새로 발굴하였다. 그리하여 한암스님이 찬술한 행장과 경허의 만행 일화 38편까지 덧붙혀 1981년에 «경허법어鏡虛法語»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경허집»의 증보국역판인 것이다. «경허법어»에는 경허의 친필 유묵이 여러 점 수록되어 있어 아쉬운 대로 경허의 글씨를 살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번역본이긴 하지만 원문(한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으며, “법문의 심장부인 <오도가>, <심우가>, <심우송>으로부터 수록”(46면)하고 일화, 행적, 연보를 마지막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법어, 서문, 기문, 서간, 행장, 영찬, 송頌, 가歌의 기본체제는 옛 판을 그대로 따랐다. 인물연구소에서 1981년에 간행된 이 증보번역판은 747면에 이르며 당시 2만 원이라는 거금의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러므로 «경허법어»는 연구자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너무 방대하고 난해한 점이 있었다. 그러던 차 금번 홍법원에서 일반 대중이 누구나 경허큰스님의 법어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간추려 «경허대선사 법어·진흙소의 울음»을 간행”(10면)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이다. 이 번역본은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좀더 현대적으로 고쳐 다듬은 것으로서 <경허선사의 일화>, <경허선사의 법어>, <경허선사의 선시>라는 세 체제로 배열하고 법어의 제목을 임의로 달았으며, 법어 일부와 선시 수백 수 중에서 아흔 수 가까이를 수록하지 않았다. 이전의 경허집은 법어나 법문을 앞부분에 수록했던 반면에 «진흙소의 울음»은 경허의 일화를 오히려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일반 독자들이 경허를 좀더 쉽게 접근하도록 의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법어의 한문은 수록하지 않았으며 선시의 한문만 함께 수록하였으나 면수는 422면에 이른다.



왼쪽으로부터 원담 번역의 «경허법어»(인물연구소 1981)와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 그리고 석명정 번역의 «경허집»(극락선원 1991)

경허집의 역사는 «진흙소의 울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석명정이 번역한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과 «경허집»(극락선원 1991년, 429면)이 있는데 이 두 번역이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동일한 역자에 의한 것이니만큼 번역 내용은 다르지 않겠지만, 1990년판이 면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간추린 번역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원담스님의 1981년판 «경허법어»와는 배열 및 제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원문 내용은 동일하다.

이상의 판본비교에서 우리는 중앙선원 판본 «경허집»과 이의 증보국역판인 «경허법어»가 경허어록 원문 연구의 기준이 되는 판본이며, 석명정의 1991년판 «경허집»은 번역본으로서만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흙소의 울음»은 일반 독자들을 위한 보급판일 뿐 학술적인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독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경허어록은 몇 가지 종류가 있을까? 모두 다섯 종류이지만, 그중 두 권은 절판되었다.

  1. 진성원담 역, «진흙소의 울음»(홍법원 1990년, 422면)
  2. 석명정 역, «경허집»(운주사 1990년, 374면) 절판
  3. 석명정 역, «경허의 무심»(고요아침 2002년, 182면) 절판
  4. 석명정 역, «마음꽃»(고요아침 2002년, 228면)
  5. 석성우 역, «나를 쳐라»(노마드북스 2005년, 223면)

원담의 «진흙소의 울음»은 앞서 말했다시피 «경허법어»의 번역문을 고쳐 다듬고 간추려 수록한 것이며, 석명정의 «경허의 무심»과 «마음꽃»은 같은 역자의 1990/91년판 «경허집»에서 추린 것으로 앞의 책은 법문을, 뒤의 책은 선시 80여 수를 뽑아 수록하였다. 특히 «마음꽃»은 사진을 곁들여 시화집처럼 꾸며서 간행한 것이며, 역자의 감상평도 들어 있다. 석성우 번역의 «나를 쳐라»는 역자의 감상평만 없을 뿐 «마음꽃»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니까 경허어록의 진수를 맛보려면 «경허집»(1942)이나 «경허법어»(원담 1981), «경허집»(석명정 1991)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진흙소의 울음»(원담 1990), «경허집»(석명정 1990) 정도의 내용은 되어야 한다. 이들에 비하면 «마음꽃»이나 «경허의 무심», «나를 쳐라»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저 얇은 분량의 예쁜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 들 뿐, 경허의 진면목을 엿보기에는 모자란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경허”를 검색해 보면,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가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진흙소의 울음»은 거의 팔리지 않은 채 어디 한데에 쳐박혀 있는 인상이 든다. «진흙소의 울음»에 대한 책소개 내용이 전무할 뿐 아니라 역자의 이름마저 표기되어 있지 않아, 과연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경허어록이 1942년 중앙선원 판본의 «경허집»으로 처음 세상에 드러난 이후 최근의 «나를 쳐라»로 마무리된 결말은 자못 씁쓸하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겠으나 현 시대의 정신적 주소를 알려주는 듯하여 괴이한 기분마저 든다. 불교서적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나 대중적인 편집본이 출간되는 것이야 푸념할 바 아니겠으나, 적어도 «마음꽃»이나 «나를 쳐라»보다는 «진흙소의 울음»이나 «경허집»이 좀더 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지는 않을까?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은 없어, 봄 산에 꽃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 없음이여,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또한 어찌하랴.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 소리는 관음의 귀로다. “이랴 쯔쯧!” 소 부르고 말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張서방 이李첨지가 본래 비로자나로다.

불조佛祖가 禪과 敎를 설한 것이 특별한 게 무엇이었던가. 분별만 냄이로다. 석인石人이 피리 불고, 목마木馬가 졸고 있음이여. 범부들이 자기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말하기를 “성인의 경계지 나의 분수가 아니다.”라 한다. 가련하구나!

[...중략...]

슬프다. 어이하리! 대저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

송頌하기를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일레.
六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네.

하였다.

이상은 <오도가悟道歌>(1981년 원담 역)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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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보급판 문고본)
나카자와 신이치 외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불교에 접근하는 통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불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각기 다를 것이다. 이제 나는 수행자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펼쳐낸 언어의 세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므로, 수행자가 아닌 이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상이한 방식, 불교를 바라보는 상이한 시선이 궁금하기도 하여 별미 삼아 이 책을 집어들었다. 특별히 융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와 젊은 시절에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고 <티베트와 모차르트>라는 기발한 제목의 책까지 쓴 종교학자가 불교를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니, 읽기 전부터 흥미로왔다. 출판사측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가와이 하야오는 "일본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적 지주"이며, 나카자와 신이치는 "일본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라 한다. 애시당초 이런 소개 문구에 대해서는 피식 웃고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융, 모차르트, 불교 등등이 얽혀 있으니 일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경박한 의견들로 채워져 있어 경청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고 본다. 두 저명한 학자의 대담을 두고 경박하다고 평가하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여길 분들도 있겠으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알 수 없는 찝찝한 느낌, 뭔가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 고대 수행자들의 표현을 빌면, "덕지덕지 때묻은 느낌", 뭔가 불투명하고 축축한 느낌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이나 선어록을 읽으면 맑고 투명한 느낌이 드는데, 이와 정반대의 느낌이 든 것이다.

물론 이 느낌 때문에 이 책이 무가치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름대로 종교학이나 인류학, 심리학 등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흥미로운 책, 나름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제까지 배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근본입장에서 이 책을 되돌아보건대,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식견 없는 잡담을 나눈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우세하다. 이들은 "불교가 좋다"고 했으나 나는 이들이 말하는 불교가 어쩐지 내가 배운 불교와 그다지 큰 상관은 없다는 판단마저 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 구판에서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종교는 오로지 불교뿐이다"라고 했으나, 2001년 신판에서는 "이것[불교에 대한 판단] 역시 시대착오적인 고찰"이라고 의견을 고쳤다고 한다. 이를 두고 가와이는 "대체로 경박한 의견에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우가 많다"(27)고 했다. 맞는 말이다. 경박한 의견에는 그 의견을 피력한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실마리가 숨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가와이나 나카자와의 개인사 내지 개인적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는 될 수 있어도, 불교 자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경박한 의견에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는 말 역시 맞다.

이 두 학자들이 제시하는 견해에 대하여 사사건건 부딪히는 대목이 많이 있으나, 그런 것들을 일일이 운위하느라 시간을 뺏기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와는 달리,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틀렸다는 것은 전혀 아니며, 다만 나같은 경우에는 일독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저렴한 문고판으로 읽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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